수동 트윗

수동 트윗 모음 : 2014. 5. 25 ~ 2014. 6. 19

1789로베스피에르 2018. 6. 29. 12:09

혁명이란 사회의 기존 구조를 그대로 두고 점진적으로 바꾸는 개혁과 달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고 그로써 인간까지 바꾸는 발본적 변화입니다. 혁명은 어쩌면...지독히 오만한 생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고대 로마 공화국이 무너진 이래로 1800년을 이어온

오후 11:39 - 2014년 5월 25일 링크

 

이 전제정과 신분제의 전통을 정면으로 부정하고, 한 번도 실현된 적 없는 이상을 최대한 있는 그대로 이 땅에 실현코자 하다니, 얼마나 무모하고도 오만합니까. 길어야 100년을 채 못 사는 인간의 이성으로 수많은 세대가 쌓아온 전통을 재단하여

 

이성이 제시하는 이상에 세상을 맞춘다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말하죠. #에드먼드_버크 하지만 그런 말에 대해 저는 반문하겠습니다. 전통이 옳아서 전해지는 것인가, 힘 있는 자들이 자신의 구미에 맞는 것을 힘으로 강요하기에

 

전해지는 것인가? 전통을 존중하면서 이루는 점진적 발전이라는 것이 혹여 강자들이 자신의 지배를 포기하지 않는 선에서 자신들에게 덜 중요한 것을 선심 쓰듯 약자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아닌가?

가난한 이들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면 기존 체제가 무너질 수 있다는 위협이 없다면 그런 선심 쓰기 수준의 양보라도 높은 분들이 하겠는가?

 

진정으로 인민은 세상의 주인이고, 그들은 본래 자신들의 것이었던 자유와 권리를 주지 않는 정부로부터 그것을 강제라로도 되찾을 권리가 있습니다. 인민에게는 '법이 권리를 앗아갈 때 권리로써 법을 부술'(#Hey_Ha_가사) 권리가 있으며,

 

그런 ‘압제에 대한 저항을 법적 형식에 맞추는 것은 폭정에 대한 최후의 미화입니다.’ #1793년_인권선언_로베스피에르의_초안 #제30조 특권 계급이 특권을 포기할 의사가 없음을 이토록 명백하게 밝히고 있고, 국민의회는 궁정이 불러들인 군대에 맞설

힘이 없습니다. 이제 ‘인민에게는 자기 자신 밖에 남지 않았으며 이런 순간에 인민에게 일어나라고 말하지 않는 사람은 겁쟁이입니다!’ #1793년_5월_26일_지롱드파_축출을_위한_무장봉기_호소

 

혁명은 불확실하고 위험한 일임은 인정합니다. 허나 감히 진짜 주인들을 경멸하는 찬탈자들의 역겨운 오만을 벌하기 위해, 감히 역사를 바꿔내는 영광스러운 오만을 범하겠습니다.


 

카미유 데물랭은 정말 정의롭고도 재능 있는 혁명가입니다. 제 친구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요. 말을 더듬고 자주 불안해하는(우리 뮤지컬에서는 안 드러나지만) 연약한 외양 속에 숨겨진,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는 정의로운 분노를 알면 깜짝 놀라게 될 겁니다!
오후 11:05 - 2014년 5월 26일 링크


카미유가 11살일 때, 아버지의 군대 친구 한 명이 집에 와서 가난한 사람들의 게으름에 대해 성토하자, 카미유는 단 한 마디도 더듬지 않고 감동적인 열변을 술술 뱉어냈다고 합니다. 또 파리를 둘러싼 군대를 물려달라는 국민의회의 요청을 궁정이 거부한 후


네케르 재무총감까지 해임하면서 ‘국민에 대한 배반’을 명백히 드러냈을 때, 데물랭은 격분하여 팔레 루아얄에서 시민들에게 무장하라는 연설을 했습니다. 순식간에 분위기를 끓게 한 멋진 연설이었다고 하니 그 자리에 없었던 게 아쉽군요.


뭐, 욱하는 성미 때문에 로낭이 제게 “당신같이 돈 많고 부패한 작자들은 항상 싸우는 척만 한다고!”라고 했을 때 화내서 싸움이 터지긴 했는데(“Hey Ha” 전, 수정 후 버전에선 “Hey Ha” 후 “Pic Et Pic” 전), 그런 성미 덕에


불의와 완강하게 싸우는 거겠죠. 다만 안타까운 점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했다는 겁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너는 아무 것도 못 될 놈이다”라고 늘 말했다더군요. 팔레 루아얄에서 한 번의 연설로 단숨에 파리 시민들을 무장시킨 후


아버지에게 그 일을 자랑스럽게 알리는 편지를 썼다 합니다. 그렇다고 카미유가 콤플렉스에 가득 찬 사람인 건 아니지만, 알게 모르게 아버지에게 짓눌리고 있다는 것이 가끔 보입니다... 카미유, 네가 언젠가 “우리가 무릎 꿇고 앉아 있는 동안만


위대한 자들은 위대하다.”라고 말했지. #바스티유_습격_며칠_후 ‘위대한 자들이 교묘한 프로파간다로 우리 인민들이 자신을 어리석다고 여기게 만들었다’(#A_Quoi_Tu_Danses_가사_변형)는 걸 너는 알잖아.


너 역시 아버지 때문에 자신을 낮추어 보지 말고 자신감을 가져. 너의 거침없는 기사와 글은 인민을 혁명으로 결집시킬 테고, 너는 이 프랑스 혁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름으로 남을 거야!

 


 

로낭의 비극적인 경험은 프랑스 인민들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로낭의 가족은 작은 자작지를 가지고 빠듯하게 생활하고 있었는데, 흉작이 덮치면서 전부터 과중해지고 있던 세금 부담을 더욱 견디기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로낭의 아버지를 비롯한 몇 사람이
오후 8:11 - 2014년 5월 29일 링크


항의를 했다가 탈세와 반란 혐의로 갤리선 노역형을 선고받았고 땅을 몰수당했고, 이에 로낭과 여러 농민들이 격렬히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군인들은 총으로 진압했고......여러 명이 죽고 로낭의 아버지는 로낭을 구하려다 대신 총을 맞았습니다...


로낭은 아버지의 복수를 하고 땅도 되찾겠다며 파리로 와 혁명에 뛰어든 것이죠. 과연 농민들이 진 부담은 참 다양하고도 무겁습니다. 왕실에 대한 부담부터 살피자면, 직접세인 타유세(la taille), 인두세(la capitation),


20분의 1세(le vingtième)는 이론적으로는 공평하게 소득이나 재산에 따라 정해지지만 실제에선 귀족과 성직자들은 면제받고 평민들만이 짊어지고 있습니다. 성직자에 대한 부담 중 대표적인 십일조는 1/10보다는 적지만, 흔히 주교, 교회참사회,


수도원, 심지어는 영주들의 배를 불리고 예배비용이나 교구의 빈민구제에는 거의 쓰이지 않아 더욱 견딜 수 없는 부담으로 느껴집니다. 가장 적대감을 일으키는 것은 영주에 대한 부담입니다. 프랑스에서 봉건제에 예속되어 있지 않은 땅은 사실상 없습니다.


봉건적 부과조는 참 다양하기도 하죠. 수렵 및 어로의 독점권, 비둘기장과 토끼장을 가질 수 있는 배타적 권리, 시장세(市場稅) 징수권, 영주를 위한 개인적 부역 부과의 권리, 방(le ban)의 권리(영주가 자기 소유의 제분기, 포도압축기,


빵 굽는 솥 등을 강제적으로 공동사용케 할 수 있는 독점권), 토지 사용권 밖에 지니지 못한 농민이 경작하는 토지에 대해 영구임대권을 지니고 매년 화폐나 생산물을 거둘 권리, 매매나 상속으로 인한 소유권 이전에 대해 부과할 권리...


이런 부과조 자체도 문제지만, 이걸 걷는 과정에서 숱한 권력 남용이 이루어지며 더없는 굴욕을 느끼게 합니다. 게다가 쇠락해 가는 지방귀족들이 그만큼 봉건적 부과조를 더욱 악독하게 징수하는 ‘봉건적 반동’이 부담을 가중합니다. 이의를 제기하는 농민은


영주의 재판권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힙니다. 금세기 내내 물가가 상승하여 영주와 성직자에게 납부하는 생산물 부담은 더 커졌습니다. 여기에 1787년의 홍수, 가뭄, 1788년 7월 13일 서부에 내린 우박 등에 의해 1788년 여름 수확이 격감했죠.


요즘, 1789년 6월 말과 7월 초 곡가는 금세기 최고 수준입니다. 정상적인 시기에 작은 자작지에 의지해 입에 풀칠이나마 하던 일반 농민들은, 곡가가 폭등하는 위기의 시기에는 땅을 잃고 거리에 내쫓깁니다. 간혹 참다못해 폭동을 일으키면,


특권층의 이익에만 복무하는 재판소들은 폭동의 진짜 원인인 특권층의 죄악에는 눈을 감고 오직 농민들만 처벌합니다. 로낭의 아버지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좋은 단어, 좋은 문장... 그동안 사람들은 굶어죽겠지!”라며 저에게 따지던 로낭의 조급함은 염려스럽지만, “난 혁명에 내 아버지를 바쳤어!”라는 그 절규는 참으로 절절한 진실입니다.


전부터 폭동을 일으켰고 이제 혁명을 일으키려는 인민들이 너무 폭력적으로 보입니까? 전 그들이 굉장히 오래 참고 봐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카피페] 저기, 방금 전에 '카페 드 푸아'에서 저랑 데물랭 싸운 거 아닙니다! 그게 어떻게 된 거였냐면요... 커피를 마시며 어제 제가 쓴 혁명 선전문을 읽고 인쇄 전 마지막 퇴고하려고 생각에 잠겨 있었는데, 카미유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오후 2:55 - 2014년 5월 31일 링크


“다 쓴 거야? 나도 읽어 볼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선전문을 던져준다는 게...선전문은 한 손에 그대로 쥔 채 다른 손에 든 커피...를 카미유에게 던졌습니다... 카미유는 뜨거워서 비명을 지르고 저도 당황해서 해명 없이 급히 데리고 나간 바람에


그 사태를 지켜본 시민들께서 혁명파 사이에 불화가 생긴 것 같다는 추측들을 하고 계신데, 그냥 제 실수였을 뿐입니다. 당사자인 카미유는 10년 넘게 이런 저를 알아 와서 이해해줬어요... 미안해, 카미유......


 

http://youtu.be/E2agKABayEw  “Pic Et Pic”에서 저는 “노래하고 건배하자, / 새로운 사상을 위해.”라고 노래했는데 로낭은 “깨어나 보면 모두 똑같지, / 똑같은 연설과 똑같은 무대. / 그 모든 아침은 / 아무 의미도 없으니 /
오후 9:52 - 2014년 6월 2일 링크


더 크게 외쳐야 할 때가 왔어. // 그런 식으로 / 내게 말하지 마. / 나보다 불행한 사람이 있을 거라니.”라고 노래했죠. 같이 혁명을 외쳐도 저를 비롯한 혁명적 부르주아들의 동기는 자유사상의 이상에 대한 열광인 반면 로낭 같은 하층 인민들의

  
동기는 당장의 빈곤에서 벗어나고 싶은 절박한 현실적 필요입니다. 분노하는 인민의 폭발력을 잘 이끈다면 이상을 향해 밀어 올리는 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앙시앵 레짐이 오랫동안 쌓아온 온갖 문제들을 한순간에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점과, 많은 국민의회 의원들이 나약함이나...어쩌면 배신 때문에 특권계급과의 타협으로 기울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혁명이 저 폭발력을 제때 만족시키는 데 실패해 통제 못하고 예상치 못한 곳으로 밀려가게 되는 건 아닐지 무척 염려스럽습니다.

 
네...제 자신이 곧 인민이 되고 싶다고 말한 것(https://twitter.com/1789Robespierre/status/467999937100120064)과는 모순되죠? 전 인민과 완전히 하나일 수는 없나 봅니다......

  
그래도 말입니다, 인민을 진정 위한다면 인민을 맹목적으로 따르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인민의 요구를 적절히 해석하여 인민을 따르면서도 바른 목표를 향해 이끌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잘할 거라고 장담은 못해도 최선은 다해봐야지요.

 


 

법학 공부를 하고 판사나 변호사로 일했지만, 아니 그 때문에 더욱 법이라는 것에 대해 회의가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1786년에 프랑수아 드퇴프(François Deteuf) 씨를 변호할 때 말입니다, 드퇴프 씨는 수도사라는 자가 자신의 여동생을
오후 7:43 - 2014년 6월 7일 링크

  
유혹하려 들었고 실패하니 자신에게 절도 누명까지 씌웠다는 것에 크게 분개하고 하면서도, 강력한 봉건적 권력체인 앙섕(Anchin)의 베네딕트회 수도원을 이길 수 있을지 무척이나 불안해했습니다. 저는 제 모든 힘을 다하겠다고 약속하면서도,

  
재판에서 틀림없이 이길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습니다. 성희롱과 무고를 한 돔 보로냐르(Dom Brognairt) 수도사의 오랜 방탕과 비리, 그리고 그걸 오랫동안 비호해 온 수도원의 부패는 그 지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런데도 행여나

  
수도원 측 변호사의 교묘한 변론과 기득권에 유착된 판사에게 질까봐 걱정해야 했습니다...! 특권계급에게 권리를 침해당한 빈민을 변호할 때마다, 진실이 명백한데도 법정에서 질까봐 걱정해야 한다는 게 참 개탄스러웠습니다. 거의 의무적 관행이 되다시피 한

  
판사에게 주는 뇌물을 마련할 돈도 없고, 제가 기득권을 공격할수록 기득권에 유착된 판사들이 제게 품는 악감도 커져서, 법정싸움이 갈수록 힘들어졌습니다. 이렇게 사법 판결의 실제가 부패했다는 것 말고 사법 절차 자체의 근본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항상 오심의 여지가 있어 가장 간악한 죄인이 무죄 방면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고, 특히 관습과 체제의 잘못에 따른 구조적 억압은 책임자 개개인의 잘못을 법적으로 밝혀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법적 절차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열 명의 범죄자를 놓치는 것보다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을 벌하는 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이고, 저는 그 이유로 사형 제도가 폐지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법이 정의를 정확하고 신중하게 실현하는 도구가 돼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특권계급의 억압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법이 인민의 권리를 해치고 있을 때는, 인민이 봉기해 압제자들을 벼락 치듯 심판할 권리가 있으며, 그런 심판은 법정의 판결만큼이나 정당합니다. 그리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상황이지만, 단 한 명의 위험한 반역자도 놓치면 큰일 날 만큼

  
국가가 위태롭다면, 정상적인 법 절차보다 빠르게 반역자들을 심판하는 절차를 일시적으로 도입할 필요가 있겠죠... #공포정치 휴...부디 그릇된 법 체계를 부수는 이 혁명이 정의로운 법 체계를 세우며 완수되기를.


* 드퇴프 사건에 대해선 전에 https://twitter.com/1789Robespierre/status/467998214549823489 이 트윗에서도 말한 적 있습니다.

 


 

교육이 왜 중요할까요? 절대 다수의 인민들이 뼈 빠지게 일하고도 입에 풀칠이나 겨우 할 수 있기에, 자신의 존엄함을 알지 못하고 지독한 무력감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그 가엾은 인민들이 자신의 존엄함을 깨닫고 동료시민들 역시 자신처럼 존엄하다는 것을
오후 8:57 - 2014년 6월 12일 링크


깨달아야,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끼리 형제처럼 서로 도우며 사는 행복한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교육을 통해 어둠 속에서 압제당하는 이들에게 빛을 비춰주는 것이 바로 계몽입니다. 그런데 계몽, 교육이라는 말이 이 시대에 얼마나 가증스럽게 사용되는지


아십니까? 통치능력은 여유에서 나온다며, 교육받지 못하고 재산이 없는 사람들은 시민으로서 보호받을 권리는 가져야 하지만 선거권자와 피선거권자로서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가져선 안 된다고 말합니다. 물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나름의 근거는 있습니다.


무지하여 충동에 쉽게 휩쓸리는 사람들은 반동파나 과격 급진파에 동원되기 쉬워 사회를 위태롭게 하고, 무지한 빈자들을 계속 그 처지에 두는 것이 아니라 참정권자의 자격을 갖기 위해 돈을 벌고 배우도록 고무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 전자는 오히려


빈민들에게 보편교육과 정치참여를 통한 정치교육을 제공해야 할 이유이며, 후자는 사회가 빈곤을 방치하면서 그 빈곤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논리잖습니까. 어떻게 교육을, 교육 못 받았거나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을 멸시하는 수단으로 쓸 수가 있습니까?


신분의 특권을 부순 자리에 부와 교육의 특권을 대신 세울 거라면 뭐 하러 혁명을 한단 말입니까? 가장 도움이 절실한 이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혁명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네, 물론 모든 사람에게 교육을 제공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긴 합니다.


모두가 교육을 받을 수 있으려면 교육이 의무일 뿐만 아니라 무상으로 제공되어야 하는데, 전제권력을 신이 준 것이라 정당화하며 전제군주와 결탁해 인민을 억압했던 가톨릭교가 계속 교육을 담당하게 둘 수는 없으니 국가가 교육을 맡아 비용을 대야 합니다.


그런데 앙시앵 레짐이 사치하고 정복전쟁 벌이느라 남긴 국채도 어마어마하고, 특권계급이 정당성 없는 신분적 특권을 이용해 차지한 것들을 국유화하고 재분배하는 데에도 저항이 대단할 것이고, 혁명적 부르주아지도 선뜻 세금을 부담하려 할지 모르겠으니,


교육 재원을 마련하기는 참 힘든 일이 될 것입니다. 그래도 프랑스는 풍요로운 땅이라 문제는 부족함이 아니라 불평등이니, 나누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괜찮을 겁니다.

 


 

http://youtu.be/HYcb8gmqVQE “Maniaque(미쳐버렸어)”에서 로낭이 “꿈꾸는 것만으로도 나는 즉시 해방되네.”라고 노래했죠. 그렇습니다, 인간은 단지 꿈꾸는 것만으로도 해방될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오후 8:37 - 2014년 6월 16일 링크

http://youtu.be/Quzx5pVounU?t=1m55s “A Quoi Tu Danses?(너는 무슨 춤을 추지?)”에서 저는 “그들의 교묘한 연설 덕에 / 우리는 스스로를 멍청하다고 여기지.”라고 노래했습니다. 전제정이 우리 인민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인민이 자신을 무지하고 무력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은 자유를 사랑하는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인민은 일반의지를 형성해 정치에 참여할 능력이 있습니다. 신은 자연법, 즉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자유롭다는 정의의 법을 모든 인간의

마음에 새겨 놓으셨습니다. 그 법은 그것을 잊어버린 노예의 마음에도 심지어 그것을 부정하려는 폭군의 마음에도 새겨져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으므로 그것을 깨닫기만 하면 곧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물론 사악한 전제 정부는 자유를 의심스럽고

두려운 것으로 생각하고 불평등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어리석은 편견을 계속 조장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전제정만 무너뜨리고 나면 인민들은 진실에 눈뜨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막으려 드는 자들은 전제정 하에서 부당하게 특권을 누리던 옛 특권층,

그들에게 매수된 자들, 또는 비겁한 자들, 이런 한 줌의 무리뿐이죠. 자유와 평등을 평화롭게 누리는 세상은 반드시 올 것이며 우리는 그 예정된 미래로 가는 길을 닦아 빠르게 도달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혁명은 어려운 과업이지만 우리가 편견과 이기심을 버리고 가장 단순하게 진실을 직시한다면 생각만큼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고 희망을 가집시다.

* ‘전제정이 우리 인민을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은 인민이 자신을 무지하고 무력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사악한 전제 정부는 자유를 의심스럽고 두려운 것으로 생각하고 신분간 불평등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어리석은 편견을 계속 조장하려고 애쓸 것입니다.’ : 1791년 12월 18일 혁명전쟁 반대 연설 중 ‘이성의 전진이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사악한 정부는 민중들의 편견, 습관, 교육에서 강력한 기반을 발견합니다. 전제정은 심지어 사람들의 정신을 타락시켜 그들로부터 찬양받는가 하면, 또 애초부터 자유를 의심스럽고 두려운 것으로 만듭니다.’ 전쟁을 통해 혁명 정신을 수출하자는 여론과 브리소파의 주장에 반대하며 전제정이 자기 나라 국민들을 어리석게 만든 역사가 깊기 때문에 무력 개입으로 단번에 자유를 깨닫게 할 수는 없다는 의미로 했던 연설입니다. 이 트윗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세상을 전제 정부의 탓으로 돌리는 의미로 썼어요.

* 신은 자연법, 즉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자유롭다는 정의의 법을 모든 인간의 마음에 새겨 놓으셨습니다. 그 법은 그것을 잊어버린 노예의 마음에도, 심지어 그것을 부정하려는 폭군의 마음에도 새겨져 있습니다. : 1794년 2월 5일 “정치도덕의 원리에 관한 보고서” 중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유와 평등의 평화로운 향유입니다. 영원한 정의의 지배입니다. 정의의 법은 대리석이나 돌 위에 쓰인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에 쓰여 있습니다. 그 법은 그것을 잊어버린 노예의 마음에도 그리고 그것을 부정하려는 폭군의 마음에도 쓰여 있습니다.’를 변형했습니다.

* 로베스피에르는 인민은 선하고 혁명과 자신의 노선을 지지하며, 소수의 악당들만이 그에 반대한다는 식의 말을 많이 합니다. 1793년 산악파 인권선언의 기반이 된 자신의 초안 제30조에 ‘인민이 선량하고 관리들이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 모든 제도는 사악한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조항은 1793년 인권선언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1792년 4월 27일 자코뱅 클럽에서 브리소파의 공격에 반박하는 연설을 할 때 “민중만이 선량하고 공정하고 관대하며, 부패와 폭정은 그들을 멸시하는 모든 사람들의 배타적인 전유물이라는 진실”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또 1794년 7월 26일(테르미도르 8일)의 마지막 연설에서도 “세상에는 어리석은 자들과 사기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기꾼의 수는 아주 적습니다. 범죄와 세상의 불행에 대한 죄를 물어 벌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들입니다.”라고 말했죠. 특히 의미심장한 것은, 1793년 2월 12일 후일 앙라제 지도자가 되는 자크 루가 쓴, 밀의 최고가격제와 밀 투기자에 대한 더 강한 처벌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파리 48개 구 대표단이 국민공회에서 낭독했을 때, 마라는 급진적 하층민들의 이 경제적 요구를 특권층의 반혁명에 매수된 선동자라고 비난했고 로베스피에르도 파리 의원들이 유권자들에게 보내는 집단적 펴지를 같은 관점에서 작성했습니다. 지롱드파에 비난거리를 제공할 것이고 산악파 부르주아들 자신들도 경제적 자유주의를 선호하고 있었기에 그 강력한 통제경제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자, 그 청원자들을 선량한 인민에서 제외되는 사람들인 것처럼 표현했던 거죠.

로베스피에르는 1792년 4월 27일 자코뱅 클럽에서 “나는 인민의 아첨꾼도, 중재자도, 웅변적 옹호자도, 보호자도 아닙니다. 나 자신이 바로 인민입니다.”라고 연설했듯, 인민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인민을 도덕적으로 미화했습니다. 그래서 신념과 내적 선의를 갖고 흔들림 없이 혁명을 추진했고 반대자들에게 가차 없었나 봅니다. 그런데 제가 궁금한 건, 자신이 제일 좌파였던 혁명 초기야 그렇다 치고 자신의 왼쪽에 앙라제와 에베르파가 등장해 상퀼로트들의 통제경제와 직접민주주의적 요구를 직접적으로 반영하며 자신과 맞설 때, 그리고 최고가격제를 제한적으로만 적용하고 최고임금제를 도입하고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봉기를 진압하며 상퀼로트 중 가장 가난한 임금노동자들의 희생을 묵인하고 생산자와 수공업자를 두둔했을 때도 자신이 인민을 그대로 대변한다고 생각했나 하는 점입니다. 하는 말로는 그런 것 같은데 내면의 생각도 그랬다면 상황을 심히 왜곡해서 인식하고 있는 거죠. 인민이 단일하지 않고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갖는다는 것과 자신 및 혁명정부가 가장 가난한 이들과 괴리되고 있다는 것을 정말 몰랐을까요? 아니면 알았지만 지지를 최대한으로 끌어오기 위해 모르는 척 했던 수사술일까요?(지금의 정치인들도 빈번히 ‘국민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요구를 지칭하는 것처럼.)



비열한 자들은 우리 혁명파를 질서파괴분자로 취급하지만 오히려 우리는 안정을 원합니다. 자유를 안정되게 누리기 위해서 혁명을 하는 것입니다. 전제 권력자가 자비롭게 자유를 허락할 수도 있지만, 제도와 실제 모두에서 인민 주권의 원리가 실현되지 않는 한은
오후 9:23 - 2014년 6월 19일 링크

권력자의 변덕에 의해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위태로운 허울만의 자유일 뿐입니다. 1750년부터 1763년까지 도서출판 감독 책임자 말제르베(Malesherbes)는 철학자로서 검열의 유용성을 믿지 않았고, 정부는 자유사상가들이 특권과 종교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 어떤 간섭도 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무지와 특권을 공격하고 이성과 진보를 찬양한 불후의 대작 『백과전서』의 제1권은 발행중지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770년 성직자회의는 ‘불경건’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으며 1775년부터 1789년까지

파리 고등법원은 65권의 저서에 대해 판매금지 판결을 내렸습니다. 특권계급은 자신들의 특권을 자발적으로 포기할 마음이 없으며 따라서 불평등 체제의 기반인 무지와 광신을 비판하는 계몽사상이 위협적으로 느껴지자마자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것입니다.

그래서 계몽사상가들과 혁명파는 검열과 탄압을 피해,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 2세(Louis Philippe II, Duke of Orléans)가 자기 권한으로 경찰 출입을 막는 팔레 루아얄 궁(Palais-Royal)에 모여 있습니다.

자유와 평등의 새로운 사상에게 피신처를 마련해준 오를레앙 공을 사람들은 평등한 필리프(Philippe Égalité, 필리프 에갈리테)라고 부르며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 염려되는 것이, 오를레앙 공이 정말 진심으로 자유와 평등을 위하는

것인지, 아니면 루이 16세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해 혁명을 이용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혹시나 후자이고 그가 성공해 혁명이 다른 전제군주를 세우는 데 그친다면 큰일인데...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으니 일단은 지켜보고 있습니다. 꽤 높은 서열의 왕위계승권자인 오를레앙 공 입장에서는 절대왕권이 아예 사라지는 것보다는 절대왕권이 유지되면서 그것을 차지하는 것이 이득이 될 텐데, 그를 마냥 믿을 수는 없잖습니까.

그래서 그가 혁명파에 행사하고 있는 영향력이 걱정스럽습니다. 당통과 데물랭도 순진하게 그와 어울리지 말고 그를 좀 의심했으면 좋겠는데......

(봇주) 참고로 여기서 말하는 필리프 에갈리테의 고조부가 루이 14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 필리프 1세입니다. 도브&알베르 콤비의 전작 〈태양왕(Le Roi Soleil)〉에도 등장하죠. 루이 16세의 현조부인 루이 14세가 주인공이고요.

*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 2세는 왕위계승서열이 꽤 높은 왕족이었는데 프랑스 혁명에 기여했습니다. ‘필리프 에갈리테’라는 칭호는 실제로는 1792년 9월 14일 파리코뮌으로부터 부여받은 겁니다. 그는 자신의 거처인 팔레 루아얄에 혁명적인 평민들이 모이는 것을 허용했고, 삼부회 때 제3신분 평민 대표들이 국민의회를 선언하자 제2신분 귀족들 중 자유주의적 소수파를 이끌고 가장 먼저 합류했습니다. 그 후 궁정에 반대 입장에 섰고, 심지어 루이 16세 처형을 주장하는 산악파와 그에 반대하는 지롱드파가 맞설 때 산악파 편을 들어 루이 16세의 처형에 표를 던졌죠.

이렇듯 산악파와 가까웠고 당통과 데물랭도 그와 가까웠는데, 로베스피에르는 그가 왕이 되려고 한다며 의심했습니다. 국민공회 의원을 선출하던 1792년 9월 19일 로베스피에르는 오를레앙 공의 입후보를 반대했는데 당통이 적극 지지해서 파리 의원 중 마지막으로 선출되었고, 로베스피에르는 이 일에 대해 당통을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1792년 12월 6일 지롱드파 의원 뷔조가 부르봉 왕가 일족 전원의 추방을 법령화하자고 제안하자, 산악파는 오를레앙 공을 방어하려고 반대했지만 로베스피에르는 뷔조에게 동의했습니다. 오를레앙파에 우호적인 당통과 페티옹의 동맹에 의해 부결되었죠. 뒤무리에(Dumouriez) 장군이 1793년 4월 5일 오를레앙 왕가의 옹립을 내걸고 군사쿠데타를 일으키려다 부하 장교들과 병사들의 거부로 실패하고 오를레앙 공의 아들 루이 필리프(후일 1830년 7월 혁명으로 프랑스 왕이 되는)와 함께 오스트리아로 망명 갔습니다. 그에 앞서 오를레앙 공은 뒤무리에 장군에 대한 의심이 높아지던 4월 1일에 체포되었고, 11월 6일에 기요틴에서 처형당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