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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뱅-상퀼로트의 반(反) 자본주의성과 비현실성

1789로베스피에르 2018. 6. 27. 13:39

원 트윗 : https://twitter.com/1789Amants_user/status/442250173323157506

 

http://bit.ly/1fdbcxo (백업글 http://blog.daum.net/1789robespierre/29) 자코뱅의 “실용주의”를 설명하는 글을 길게 쓰긴 했지만, 자코뱅에게 현실과 동떨어진 측면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자본주의화’를 거스르는 측면이 있었다는 점에서요. 자본주의화는 자본의 집중, 생산수단의 집중과 대량 생산, 소농과 소규모 수공업자 같은 소규모 생산자들의 감소와 피고용 프롤레타리아의 증가 등을 특징으로 하죠. 프랑스 대혁명 당시는 영국이 선도하던 산업혁명이 막 시작되던 즈음이었고, 프랑스는 리옹의 견직물 산업 등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었으나 아직 도시화와 자본의 집중이 미약하고 상당수가 소규모 생산자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프랑스가 봉건제 사회였냐 자본주의 사회였냐, 그래서 프랑스 대혁명이 사회경제적 변화였느냐 단순 정치적 변화였느냐가 정통주의 해석과 수정주의 해석 간의 논쟁거리인데, 양쪽 다 당시가 완전히 봉건제 사회도 아니었고 완전히 자본주의 사회도 아니었다는 데에는 동의하는 듯합니다.

아무튼 공포정치기에, 자코뱅파의 중소 부르주아지는 독립적인 소(小) 생산자들의 자유롭고 다소 평등한 사회라는 루소의 이상에 심취해서 그리고 대규모 상공업이나 금융업으로 막대한 부를 벌어들이던 대 부르주아지에 대한 막연한 적대감 때문에 자본주의화에 어느 정도 적대적이었습니다. 자코뱅파를 지지하고 집권하게 해준 상퀼로트는 작은 작업장이나 상점, 작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자신들을 프롤레타리아로 추락시킬 자본주의화에 적대적이었고요. 그래서 공포정치 때 자본의 집중을 방해하는 정책들이 실시되었습니다. 성직자들과 망명 귀족들에게서 몰수한 국유재산을 더 소규모로 쪼개 팔고 분할 납부 기간도 길게 해서 더 하층의 농민들도 토지를 살 수 있게 했고, 최고가격제나 징발이나 국유 생산 등의 통제 경제 정책을 취했죠. 그 결과 프랑스는 자본주의 발달에 있어서 영국에 뒤처지게 됩니다. 그래서 상퀼로트는 정치적으로는 선진적이나 경제적으로는 보수적이었던 분파로 평가받기도 하고요.

하지만 상퀼로트와 자코뱅파의 반(反) 자본주의적 면모를 너무 과장해선 안 될 것입니다. 상퀼로트들이 모든 사람이 하나의 상점이나 작업장이나 일정 이하의 토지만 가져야 한다는 비현실적 평등주의를 주장하긴 했지만, 그들도 대부분 이미 작은 재산과 생산수단을 가진 사람들로서, 또는 그런 고용주들과 다른 자신만의 이해관계를 자각하지 못하고 고용주들과 생각을 함께 하고 있던 피고용인으로서, 재산의 보존과 재산을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어느 정도의 경제적 자유에 애착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상퀼로트의 기수를 자처하던 로베스피에르가 “재산이 별로 없을수록 재산을 보존하려는 마음”은 더욱 신성한 재산권을 구성한다, 이들의 “몇 푼 안 되는 월급”과 “자그마한 저축”을 보호해야 한다고 했고, 만약 모든 부자들이 “사회 전체를 위한 회계담당자”처럼, 그리고 “빈자들의 형제”처럼 행동한다면 “가장 무제한적인 자유의 법 이외의 다른 법”은 필요 없을 것이라고 했던 거죠.
자코뱅파 혁명정부는 상퀼로트보다 더욱 자유주의적이었던 게, http://bit.ly/1fdbcxo 처음에 링크한 저번 트윗에서 말했듯 상퀼로트가 요구한 통제경제정책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했습니다. 또 후에 그것을 시행하는 데에 있어서도 대외전쟁 수행을 위해 필요한 정도로 한정했습니다. 최고가격제는 꼭 필요한 빵과 군수품에만 엄격히 적용되고 다른 품목들에 대해서는 위반이 성행하고 처벌도 잘 안 이루어졌죠. 국유 생산도 군수품에 한정되었고요. 네, 로베스피에르가 “고대의 '덕'의 윤리에 입각한 시민적 가치와 애국주의를 결합한 공동체를 만들려” 했고 “이기적인 근대의 개인주의”에 도덕적 혐오감을 보였던 건 맞는데요, 말로는 그랬고 내면도 그랬을지 모르지만 실제 행동과 정책에서는 부르주아적 자유 논리와 상퀼로트적 평등 논리 사이에서 정치적 균형에 신경을 썼습니다.

아무튼 간에 공포정치를 주도한 자코뱅파와 상퀼로트의 연합은 그 전후의 주도세력에 비해선 반(反) 자본주의성과 비현실성을 보였습니다. 푀양파의 바르나브는 국왕이 망명하려다가 붙잡힌 ‘바렌느 탈주 사건’(1791년 6월 20일) 후 루이 16세 재판과 폐위에 반대하며 “자유의 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감은 왕권의 폐지요, 평등의 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감은 소유권의 폐지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죠. 자코뱅파 혁명정부가 몰락한 테르미도르 반동 후 1794년 9월 8일에 의원 로조는 ‘모든 프랑스인을 지주로 전환시키는 것은 물질적으로 불가능하다. 백번 양보해 전 농민을 독립된 경작자로 전환시킬 수 있다 해도, 그렇게 되면 대차지농, 상인, 실업가들은 그들의 사업에 필요한 노동력을 과연 어디서 구할 것인가?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라는 존재는 부르주아적 사회경제적 질서의 필요조건이다.’라는 요지의 말을 했습니다. 사회학이고 경제학이고 학문으로서 발달하기 전이었다는 시대적 한계를 감안해도, 자코뱅파와 상퀼로트는 사회경제적 안목이 전후의 주도세력에 비해 떨어졌다는 거죠.

그래도 전 이 자코뱅 공화국의 사상과 정책을 고찰하는 것이 현대의 우리에게 적잖이 의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물질적 기반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공산주의나 기계적 평등이 아닌 온화한 국가개입을 통한 어느 정도의 평등을 지향했습니다. 명확한 사회경제적 전망이 아니라 고대 로마 공화국에 대한 이상화와 루소 사상에 대한 심취에서 나온 도덕주의적 성격이 짙었지만요.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의 발전이라는 당시의 조류에는 역행했지만,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이 공산주의의 역사적 실패라 본다면 그만큼 대공황은 극단적 자유방임주의의 실패라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뭐, 역사적 실패라고까지 단언할 수 없겠지만 극단적 자유경제도 극단적 통제경제도 일반적으로 거부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정 정도의 재산을 갖는 온화한 평등으로써 자유를 보장한다는 자코뱅의 기획은 당시의 조류를 넘어서 현대와 맞닿아 있지 않아요? 그런 차원에서 장 피에르 그로스(Jean-Pierre Gross)의 르몽드 기고문(http://blog.naver.com/kimseye3/130068532433)이 “자유와 평등의 조화, 자코뱅의 현대적 가치”라는 제목을 달고 있죠.

자코뱅의 ‘현실성’으로 이상의 이야기처럼 현대의 관점에서 재평가할 만하나 당시의 조류에는 역행했던 자유주의적 평등주의도 있지만, 당시에 절실했던 다른 현실성도 있습니다. 바로 대외전쟁(프랑스 혁명전쟁)의 수행이죠. 당시 자코뱅 혁명정부의 제1과제였고, 다른 정파들이 자코뱅을 지지해 준 거의 유일한 이유였습니다. 비록 공포정치라는 무시무시한 수단을 통해 얻은 강제력이었지만 그로써, 국민총동원령으로 대규모의 군대를 소집하면서도 전보다 더 적은 재원으로 지탱했고, 대규모의 징발과 징집, 군수생산의 국유화를 통해 근대적 총력전 체제에 가까운 것을 조직하여 전쟁을 지원했습니다. 공포정치로 인해 귀족 출신이나 온건파 혐의를 받는 군 장교들이 숙청되는 불안정성을 조성한 건 전쟁 수행에 방해였지만 그런 혼란과 공백 와중에 평민 출신의 유능한 하급 장교들이 빠르게 승진하기도 했죠. 이렇게 해서 거의 전 유럽이 뭉친 제1차 대불동맹으로부터 사방에서 공격받고 내부에서 혁명정부에 반대하는 봉기를 겪으면서도, 대외전쟁에서 빠르게 승리해 벨기에를 점령하고 후의 나폴레옹 전쟁에까지 이어지는 군사적 우세를 시작했습니다. 대단한 인명 희생과 국내 정세의 혼란 등으로 자코뱅 정권 자신이 무너질 정도였으니 나라를 잘 이끌었다고는 말 못하겠지만, 이렇게 국민국가와 프랑스 자체를 일단은 지켜냈으니 나라를 말아먹었다고까지 말하는 건 좀 부정확하지 않나...하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