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k.fm 주소 : https://ask.fm/Robespierre1789/answers/133974767487
원 트윗 : https://twitter.com/1789Robespierre/status/665766758179991553
[ask.fm 익명 질문] 저 궁금한 거 생겼어요! 1789년 프랑스 인권선언문과 1793년 인권선언문 초안은 무슨 차이고 또 제안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ㅇㅁㅇ!!
https://twitter.com/1789Robespierre/status/665537033465524226 이 트윗을 보고 궁금해지셨나 보군요. 1789년 인권선언은 아직 하층민들―정확히 말해 상퀼로트 계층―이 정치의 전면에 드러나기 전, 그리고 부르주아와 상퀼로트의 갈등이 나타나기 전 부르주아지가 자신들을 곧 보편적 인민으로 자신하고 있을 때 채택된 선언으로, 부르주아적인 개인주의, 즉 로크(John Locke)적인 개인주의적 사회관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특히 소유권과 그 연장선에서 조세에 관한 조항들(2, 12, 13, 17조)에서 잘 드러납니다. 소유권은 자연권의 하나로서 국가가 결코 침해 할 수 없으며, 조세는 자연권을 보장하는 국가의 유지를 위해 필요하며 소유의 크기에 비례해야 하고 소유권자들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견해는 사회란 개인들의 총합이며, 그것을 능가하는 공유재산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철저하게 개인주의적 사회관을 반영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회문제와 관련한 어떠한 조항도 1789년의 인권선언은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또한 1789년 선언은 구체제를 완전히 폐지하지 않았다는 역사성을 반영합니다. 그래서 7-9조와 같은 형법관계 조항들, 종교와 관련한 10조, 사상의 자유와 관련한 11조 등은 구체제의 관행을 떠올리게 합니다. 후일 지롱드파와 산악파가 되는 당시의 극좌파들―지롱드파와 산악파는 국민공회의 우파와 좌파를 이루었지만 차이는 크지 않았습니다. 모두 남성보통선거제로 대변되는 정치적 민주주의에 동의했으며 경제적 평형을 위한 누진세에도 동의했습니다. 다만 상퀼로트에 대한 양보의 폭에서 서로 달랐습니다.―도 사회경제적 요인에 완전히 눈을 뜨지 못했고, 대신 구체제를 남겨놓고 자유권을 제한한 점을 주로 비판했습니다. 1789년 인권선언을 제헌의회에서 논의할 때, 저를 비롯한 좌파 인사들은 표현의 자유를 규정한 제10조의 "법이 규정한 공공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한"이라는 유보 조항과 제11조의 "다만 법이 정한 경우에 그 자유의 남용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한다"라는 유보 조항에 반대하며 무제한적인 표현의 자유를 주장했습니다.
1789년 인권선언은 1791년에 완성된 헌법의 전문(前文)이 되었습니다. 당초에 1789년 인권선언을 채택한 후 다음 날 8월 27일에 여러 의원들이 추가할 조항에 대한 논의를 계속하자고 했으나, 의회는 권리선언에 부가될 조항들에 대한 토론을 헌법 제정 이후로 늦춘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2년 뒤인 1791년 9월 3일에 의회는 헌법을 공포하며, 이미 신성한 성격을 얻은 1789년의 인권선언을 손대지 않기로 하고 표현상의 사소한 수정만을 가한 채 그대로 헌법의 전문으로 채택하였습니다. 그러나 의회는 추가할 조항이 있음을 외면하지 않고, 헌법의 모두(冒頭)에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 조항들’이란 별도의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17개조를 거의 그대로 되풀이하는 한편, 1789년의 인권선언에는 없는 새로운 권리들, 예컨대 공공구제의 이념이나 무상의 공공교육권, 또는 시민들의 회합권이나 청원권 등이 포함했습니다. 이는 좌파가 성장했고, 국왕과 특권층이 비타협적인 가운데 정국을 주도하던 라파예트 등 중도파의 타협 정책이 흔들려 좌파에게 어느 정도 자리를 내주었던 2년간의 상황 변화를 반영합니다.
1792년 8월 10일 봉기로 국왕 가족이 탕플 탑에 유배되고 9월에 공화국이 선포된 후, 새 의회인 국민공회는 새로운 체제에 맞는 새로운 헌법을 만드는 임무를 맡게 됐습니다. 좌파인 산악파의 의견에 따라 1793년 1월 21일 루이 카페(루이 16세)가 처형되고 5월 4일 파리 상퀼로트의 요구에 따라 곡물에 대한 최고가격제가 통과되는 등의 정국 속에서 다수파가 자신들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느낀 우파 지롱드파는 자신들에게 지배당하려 하지 않는 국민공회 대신 더 유순한 새로운 의회를 준비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국민공회의 존재 이유인 새로운 헌법 제정을 빨리 해치우고자, 4월 15일 갑작스럽게 랑쥐네와 뷔조는 새로운 인권선언은 제쳐두고 헌법의 실제적인 조항을 우선 결정하자고 요구했습니다. 86명의 산악파 의원들이 지방으로 파견되어 자리를 비웠을 때였죠. 저는 이 술책을 물리치기 위해, 그리고 헌법이 지켜야 할 권리의 성격과 우리 혁명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인권선언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의회는 받아들였습니다. 곧 4월 21일에 저는 인권선언의 초안을 자코뱅 클럽에서 낭독했고 24일에는 해설과 함께 국민공회에서 제안했습니다. 제 초안에서 소유권의 신성불가침성을 비판하고 소유권을 사회에 의해 규정되는 권리로서 빈자들의 생존권을 보호하기 위해 제한할 수도 있는 권리로 표현한 것은 상퀼로트의 지지를 끌어들이는 역할도 했습니다.
1793년 5월 31일과 6월 2일의 봉기로 지롱드파가 국민공회에서 축출되고 산악파가 국민공회와 혁명의 주도권을 잡았습니다. 산악파는 독재를 추구하고 사회적 무정부주의를 조장한다는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헌법과 그 전문인 인권선언의 제정을 서둘렀습니다. 산악파 헌법은 1793년 6월 24일에 국민공회에서 가결된 후 국민투표에서 1만 8천 명 미만의 반대와 18만여 명의 지지를 얻어 통과되었습니다. 산악파 인권선언 전체 35개조는 그 전 1793년 5월 29일에 발의된 지롱드파의 인권선언의 콩도르세의 초안에서 23개 조를 그대로 채택했으며, 나머지는 대부분 저의 초안과 롬(Gilbert Romme)의 초안의 것을 채택했습니다. 지롱드파의 선언과 산악파의 선언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으며 다만 강조의 차이가 있습니다. 1789년의 인권선언과 비교하여 볼 때, 17개 조항의 대부분을 보다 강력하게 천명하는 한편, 권력의 분립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 사실상 입법부의 주권성을 승인하고(입헌군주정 시기 국왕과 그가 임명한 각료들의 행정부가 보인 실패 때문에) 소급적용의 배제, 예속신분의 원천 봉쇄, 공공부조권, 교육권, 사회적 보장, 헌법개정권, 봉기권 등을 표현상의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으로 공유하여 혁명이 이룩했던 급진적 성과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민중혁명에 대해 양 정파가 보였던 차이는 거의 그대로 선언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롱드파의 선언’은 자유의 보장에 훨씬 더 집착하고 법적 보장에 더욱 치밀하고 의미심장하게도 전문을 없애고 자연권의 이념을 포기하고 “사회 속의 인간의 권리들”만을 언급하였습니다. 이와는 달리 ‘산악파의 선언’은 전문을 되살리고 제1조에서 “사회의 목적이 공동의 행복에 있고” 정부 설립의 목적이 “소멸할 수 없는” 자연권의 “향유를 보장하는” 데 있음을 명확히 하였습니다. 아울러 평등의 이념에 보다 집착하고 국민의 청원권을 신설하고 인민주권론을 제시하면서도 제26조에서 “의회를 이룬 주권자의 각 부문은 자신의 의지를 완전히 자유롭게 표명할 권리를 향유해야 한다”고 하여 민중의 압력에 대한 견제의사를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헌법 본문에서는 지롱드파 콩도르세의 초안이 직접‧보편선거의 항구적 실시에 바탕을 둔 반면, 산악파의 헌법은 그 시행을 제한했습니다. 국민의 직접선거를 실시한다면 생쥐스트가 '명성귀족'이라고 명명한 지롱드파가 승리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산악파 헌법에서는 의원들만이 1차 의회에서 단기명 투표에 의해 선출되며, 공무원, 법관, 행정관 등의 선임은 2단계 제도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1차 의회에서 선출‧구성된 선거의회가 그들을 지명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행정자문위원회의 선거는 3단계로서 선거의회가 제출한 명단 내에서 국민공회가 선출하게 되어 있습니다.
1793년 산악파 인권선언은 지롱드파의 선언을 반영하면서 제 초안의 급진성을 상당히 중화시켰습니다. 소유권에 대한 조항인 9-12조를 삭제하고 제1-2조에서 자연적이고 소멸할 수 없는 권리를 평등, 자유, 안전, 소유권으로 규정했습니다. 애국적인 부르주아지를 반혁명으로부터 완전히 떼어놓기 위해서는 소유권의 신성불가침성을 의심하는 것은 적절치 않기 때문입니다. 형제애의 의무를 규정한 33-36조도 삭제되었습니다. 적이 모든 국경을 침범하고 전체 도의 3분의 2가 중앙권력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상황에서 또 다른 무장 간섭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은 적절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항권을 과격한 어조로 규정한 제30조 '압제에 대한 저항을 법률적 형식에 종속시키는 것은 전제정에 대한 최종적인 미화이다. (중략) 인민이 선량하고 관리들이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 모든 제도는 사악한 것이다.'도 삭제되었습니다. 저는 제 초안의 조항들을 삭제하는 이유에 공감했기에, 사회는 모든 구성원들에게 교육을 제공할 의무를 갖는다는 조항 하나를 제외하고는 저의 초안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대신 1793년 헌법을 열렬히 찬양하고 헌법이 아직 사람들이 바라는 만큼 이론적으로 완벽하지는 않지만 세월이 더 좋아지면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대외전과 내전에 시달리는 대위기 상황에서 정부는 입헌적 원리를 고수할 수 없어 전시체제로서의 공포정치를 운영했으며, 1793년 10월 10일 생쥐스트의 제안에 따라 "프랑스의 임시정부는 평화를 찾을 때까지 혁명적이다."라고 선포하고 헌법을 '언약의 궤'에 넣었습니다. (* 그리고 시행하지 못했습니다.)
* 참고 자료
최갑수 교수의 프랑스 혁명기 인권선언들 비교와 1789년 인권선언의 작성 과정 강의 : http://khrrc.org/?mid=refer&search_target=title&search_keyword=%ED%94%84%EB%9E%91%EC%8A%A4+%ED%98%81%EB%AA%85&document_srl=3161 인권연구소 '창', 초청강의, "프랑스 혁명과 인권"
최갑수 교수의 프랑스 혁명기 우애 이념에 대한 강의와 인권선언들의 간략한 비교 강의 : http://khrrc.org/?mid=refer&search_target=title&search_keyword=%ED%94%84%EB%9E%91%EC%8A%A4+%ED%98%81%EB%AA%85&document_srl=3279 인권연구소 '창', 초청강의, "프랑스 혁명과 우애의 이념"
산악파 헌법이 콩도르세의 초안과 달리 직접‧보편선거의 시행을 제한했다는 설명 : F. 퓌레, D. 리셰, <프랑스 혁명사>(김응종 역, 일월서각, 2000) 253-254쪽
로베스피에르의 인권선언 초안 일부 한국어 번역과 제안 이유, 산악파 인권선언에서 일부 조항들이 누락된 이유에 대한 설명 : 장 마생,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양희영 역, 교양인, 2005) 397-403쪽, 422-424쪽
로베스피에르의 인권선언 초안 속 소유권(재산권)에 대한 설명 : http://sarangbang.or.kr/bbs/view.php?board=hrweekly&id=74 인권운동사랑방 인권오름, 류은숙, "[인권문헌읽기] 로베스피에르, “재산권에 대하여”(On Property Rights, 1793)"
로베스피에르의 인권선언 초안 전부 프랑스어 원문 : http://www.xn--lecanardrpublicain-jwb.net/spip.php?article378
'역사 관련 글, 기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 해설 (0) | 2018.06.27 |
---|---|
자코뱅의 '자유의 전제' 그리고 독재와 민주주의가 양립할 수 있는 논리 (0) | 2018.06.27 |
아이티 혁명과 프랑스 혁명 (0) | 2018.06.27 |
문민정부를 위한 자코뱅의 노력 : 군부 권력에 대한 견제 (0) | 2018.06.27 |
프랑스 혁명 중 세속화의 정치 : 성직자 민사 기본법과 탈기독교화 운동 (0) | 2018.0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