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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6.29 수동 트윗 모음 : 2017. 12. 31 ~ 2018. 6. 16

올해의 마지막 밤 편안하게 보내고 계십니까? 올해를 반성하고 새해에는 새로운 자세로 시작하겠다고 다짐하고 계시겠죠. 근데 따지고 보면 시간은 미래로 끊임없이 흐르며 연도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분절입니다. 꼭 내일이 한 해의 시작이란 법은 없죠. 고대 로마 공화정을 위협한 카이사르와
오후 11:43 - 2017년 12월 31일 링크


공화정을 무너뜨린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받은 7월과 8월을 31일로 만들기 위해 2월을 28일로 만들었잖습니까. 이건 2월에 대한 착취입니다! 이후 전제왕권을 뒷받침한 가톨릭교까지 새긴 지금의 달력에 필연성은 없으며 새로운 역법으로 대체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프랑스_공화력 #프랑스_혁명력


사실 "2월에 대한 착취"는 반쯤 농담이었고 역법의 교체가 필수적인 것까진 아닙니다. 하고 싶었던 말로 되돌아가자면, 꼭 새해가 와야만 새로운 의지를 다질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새해가 왔다고 지난 해까지 쌓아온 것들이 갑자기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매일 아침에, 아니 하루의 도중에도


우리는 계속 의지를 다지며 매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새해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 할 때도 이제까지 해온 일들이 버팀목이나 걸림돌이 될 수 있으니, 그것을 파악해 고려하면서 새 계획을 짜야 합니다. 그런데 이는 역사를 완전히 새로 쓰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 혁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혁명이 세상을 바꿀 거대한 기회를 열었지만 전에도 세상을 조금이라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은 할 수 있었고, 그런 노력이 쌓여왔기에 이 혁명이 일어난 것이지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구체제의 관습을 그저 답습했을 뿐이라 해도 압제를 행한 자들의 책임이 면제되지 않는 거고요.


그리고 혁명이 일어났어도 구체제의 악습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그것과 타협하느라 발목 잡히든, 그것을 없애려고 싸우든, 그것의 제약하에 있을 수밖에 없죠. 이거야말로 죽은 자들의 유령이 꿈속의 악마처럼 산 자들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 광경 아닙니까. #마르크스


그래도 새해, 혁명은 새로 시작할 계기가 될 수 있죠. 이제까지 해온 잘한 일은 이어받아 발전시키고 잘못한 일은 제대로 정리하고 고쳐서, 보람차고 행복한 해를 보내시길 바랍니다. 우리 혁명도 청산과 건설 모두 훌륭하게 해낼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안녕히 주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는 법으로 우리의 권리를 앗아갔으나 / 우리는 권리로써 그의 법을 깨뜨리네."(Hey ha) 자유는 절대적이고 완전해야 자유라 할 수 있으며 심지어 법조차도 자유를 제한할 수는 없습니다. 법은 자유의 보호자일 뿐이며, 그렇지 못한 법은 깨뜨려서 자유를 지켜야 한단 말입니다.

오후 7:38 - 2018년 2월 7일 링크


자유는 전부가 아니면 전무입니다. 자유란 완전하지 않으면 아예 없는 것입니다. 전제정에 아주 조금의 수단이라도 남겨놓으면 곧 그 권세를 회복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유에 어떤 제한이나 유보조건을 달기 시작하면 그것은 가죽 늘이듯 멋대로 해석해 무엇이든 억압할 수 있는 도구가 됩니다.


그래서 제가 1789년 인권선언을 만들 때 제10조 "누구도 자신의 의견 표명이 법이 규정한 공공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는 한, 설사 그것이 종교적인 것일지라도 그 의견 때문에 괴롭힘을 당해서는 안 된다."에서 앞의 단서조항을 삭제하자 한 겁니다. 기각당했지만요...


루스탈로 씨도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의 신문 <파리의 혁명>에서 "실제로는 공공 질서를 문란케 하지 않는 한 과거와 현재, 미래에 관한 사실에 대해 동료시민들의 눈을 열어줄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했죠. 법이, 심지어 민주정의 법도 자유를 억압할 수 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법 질서 유지를 위해 봉기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름지기 혁명이란 세상을 바꾸는 것인데, 흔들지 않고 바꿀 수 있겠습니까. 자유의 대가로서 다소의 혼란과 무질서는 감수해야 합니다. 자유란 법과 제도만 있으면 절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침해하려는 세력을 물리치고


쟁취하는 것이며 이후에도 늘 깨어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소란을 일으킨다고 무조건 폭도로 선언한다면 가장 용감한 자유의 수호자들을 내치고 자유에 대한 사랑을 질식시키게 될 것입니다. 약탈이나 살인 같은 명백한 법 위반에 해당하지 않는 봉기나 소유는 '용감한 자유'로서,


그걸 탄압하면 결국 독재를 초래할 겁니다. 자유를 포기하고 얻는 평화란 도적들에게 원하는 것을 내어주고 얻는 노예 상태와 같습니다. 오히려 가난한 인민이야말로 자유와 함께하는 진정한 평화를 원하니, 사회가 혼란과 무질서에 빠지면 약자들이 먼저 생계를 위협받기 때문입니다.


인민에게 자유와 생존을 보장하면 소요를 일으킬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법보다 자유가 우선이라 했지만 당연히 법도 중요합니다. 법은 모두를 평등하게 구속함으로써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자의적 지배를 막기에 중요한 자유의 보호자입니다. 그러나 법이 자유를 한정할 수는 없으며,


자유의 한계가 되는 것은 또 다른 자유, 즉 타인의 자유와 권리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제가 "자유는 정의를 모범으로, 타인의 권리를 한계로, 자연을 원칙으로, 그리고 법을 보호자로 삼는다."라고 하는 거죠. (* 1793년 헌법의 로베스피에르 초안 제5조)


제가 절대적인 자유를 주장하면서 경제적 자유는 제한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생존에 꼭 필요한 곡물을 팔지 않고 쌓아둔 바람에 빈민들이 굶주린다면, 소유권이 생존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법령으로써 제한해야 합니다. 물론 재산권도 소중한 가치고,


특히 가난할수록 몇 푼 안 되는 월급과 자그마한 저축을 지키려는 마음은 더욱 신성한 재산권을 이룹니다. 다만 재산 전유의 자유가 동료시민을 해치면서까지 행사될 수 없다는 단 하나의 조건만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혹자가 말하는 자유는 어떤 것입니까?


동료시민들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것도 남겨놓지 않고 무한정 재산을 쌓고자 하는 욕망만을 자유라고 하며, 그 자유를 위해서라면 생존을 요구하는 인민을 폭도로 몰아 짓밟아줄 독재자를 세워 진정 소중한 자유까지 바치려 하지 않습니까? 이제 겨우 구체제의 사슬에서 풀려난 우리를


또 다른 사슬로 묶고 심지어 그 사슬을 자유라 하는 자들을 경계하십시오.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또 진정한 자유의 주체인 진정한 자아는 무엇인지 생각하십시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진실로 자신을 실현하여 진정한 자아가 되기 위해 갖추어야 할 '덕성'에 대해서도 다음 시간에 말해보겠습니다.


* 전반적으로 김경근 <로베스피에르: 자유와 덕>을 많이 참고했습니다.


* "그 자유를 위해서라면 생존을 요구하는 인민을 폭도로 몰아 짓밟아줄 독재자를 세워 진정 소중한 자유까지 바치려 하지 않습니까?"는 혁명 초기 민중봉기 및 소요가 잦자 민중 세력을 견제할 더 강한 행정권을 위해 국민의회가 국왕의 법률 거부권과 계엄령 등을 입법한 데에 로베스피에르가 반대한 것을 암시합니다.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밸런타인데이)군요. 고대 로마의 황제 클라디우스 2세가 군기 문란을 이유로 병사들의 결혼을 금지하자 성 발렌티누스 사제가 이를 어기고 혼인성사를 집전했다가 순교한 날을 기념해, 연인 간에 사랑을 확인하는 축일이 되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1112565&cid=40942&categoryId=32179)

오후 1:19 - 2018년 2월 14일 링크


사랑과 결혼이라는 두 사람 간의 사적인 일조차 압제의 대상이 됐으며 목숨을 바치는 저항이 필요했던 겁니다. 정치고 인권이고 모르겠고 나 하나의 안위와 풍요만 지키면 그만이라는 이들이 많죠. 하지만 압제자가 사적 자유라고 내버려두리라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나라는 인간을 이루는 것은 잘 먹고 잘 자고자 하는 부분만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가지고 동료들과 나누고자 하는 부분도 있죠. 자신을 짐승과 구별해주는 존귀한 부분을 포기하고서 짐승과 다를 바 없는 부분만을 보고 사는 것이 어찌 인간의 삶이겠습니까?

(* '인간을 이루는 것에는'이라고 해야 문법에 맞겠네요. 죄송합니다^^;;;)


그렇게 짐승이 된 후에는 더 쉽게 부려질 수 있으며 그로써 짐승의 만족마저 누리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건 압제 하에서 사적 공간만의 평안으로 도피할 수 없다는 얘기인 동시에, 사적 일상 속에서 자유에 깨어 있음으로써도 압제에 저항할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우리의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자유를 위해, '연인들이여, 금지된 맹세를 외칩시다.'("Ça ira mon amour")




https://twitter.com/1789Robespierre/status/961188728197689346 저번에 자유에 대해 말했죠. 제 생각에 자유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덕의 정치입니다. 덕의 정치라 하면 국가가 개인의 내면까지 부당하게 간섭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이것도 완전한 자유를 위한 것입니다. 몽테스키외는 공화정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덕이라 했습니다. 공화정의 관건은

오후 8:37 - 2018년 4월 14일 링크


인민의 주권행사로서의 자유와 주권에 대한 복종으로서의 준법을 조화시키는 것인데, 이를 조화시키는 것이 덕성입니다. 유덕한 사람은 법을 준수함으로써 자유를 찾고자 하지만, 덕성이 사라지면 야심과 탐욕이 대신하므로 법을 구속으로만 여기고 법을 어김으로써 자유로워지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군주정에서는 국가의 주인이 아닌 인민이 국가를 사랑하기 어려우므로 위계 질서를 뒷받침하는 명예가 덕을 대신하는 것과 대조적이죠. 저는 군주정에서 인민의 덕을 억압한 주된 이유는 덕으로 무장한 인민은 권력자와 폭정을 공격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보지만요. 같은 이치로 공화정 중에서도


소수 귀족들이 주권을 갖는 귀족정은 귀족들로 하여금 지나치게 권력을 휘두르지 않게 하는 절제가 요구될 뿐인데, 인민 전체가 주권을 갖는 민주정에선 모든 인민에게 높은 덕성, 즉 조국애와 평등애가 요구됩니다. 조국에 대한 사랑은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정념을 억누르고 국가의 보편적 이익을


추구하는 정념을 고무합니다. 또한 평등에 대한 사랑은 각자가 같은 정도의 행복을 누리길 바라게 만들어 동료시민을 착취하지 않고 오직 조국에 헌신하게 합니다. 이런 덕이 없다면 시민들은 각자의 사익 추구에만 골몰하게 되어 사회에 불평등이 고착되고 시민 간에 착취와 억압이 횡행할 것입니다.


또한 자유는 그것을 침해하려는 세력에 맞서 지켜내야 하는 것인데, 덕으로 무장하지 않은 시민이 그럴 힘이 있겠습니까?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민주정의 시민은 한 덕 있는 지사가 폴란드 국회에서 한 "나는 노예의 평화보다 위험한 자유를 택한다."라는 말을 평생 날마다 마음 속 깊이 외쳐야


한다고 했죠. 사실 루소는 민주정이 유지하기 매우 힘든 정체이며 순수한 민주정은 신들에게나 가능할 것이라는 맥락에서 한 말이지만, 저는 이런 덕이 가능하며 또한 요구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루소의 뜻을 루소가 믿을 수 있었던 것 이상으로 실현시킬 수 없다고 누가 말하겠습니까?




주말 잘 보내고 계십니까? 오늘 할 일은 마쳤고 미리 끌어올 나중 일도 없는 밤인데, 밤 늦게까지 일하던 버릇이 드니 잠이 오지 않는군요. 늦은 밤이나 새벽에 혼자 깨어있으면 그 고요함에 현혹되는 듯 온갖 생각들이 날아들어 심란해지던데 말입니다...

오후 11:58 - 2018년 4월 21일 링크


전 생각을 너무 많이 하지 않으려 합니다. 현실적 장애물, 인간의 이기심과 어두운 면, 타협의 안락함, 실패의 가능성... 대신 자유, 평등, 우애, 인권, 정의, 미덕, 이런 것들이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래서 편협하다는 평을 듣지만 저는 그 밖을 모르는 제가 자랑스럽습니다.




사실 오늘이 제 생일입니다. 축하해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부족한 제게 이토록 마음을 써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도록 황송하면서도 기쁜 날입니다. 여러분도 행복한 하루를 보내고 계시길 바랍니다.

오후 9:16 - 2018년 5월 6일 링크


사실... 저는 오늘이 생일인 것이 늘 슬펐습니다. 왜냐하면... 부모님의 결혼식이 제 생일보다 넉 달 정도 앞서고, 부모님의 그 "악덕"이 아니었다면 제 생일이 훨씬 늦었을 테니까요......


어머니께서는 제가 6세일 때 다섯 째 아이를 사산하고 돌아가셨고, 아버지께서는 그 직후부터 방황하시다가 2년 후부터 가출을 반복하시더니 연락이 끊어졌습니다. 제법 뒷말이 있었고, 저는 태어남에 이어 또 한 번 불명예를 뒤집어 썼죠.


저는 유산처럼 떠맡은 불명예를 씻기 위해 학업에 열중했고, 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변호사로서 역시 유산으로 빈곤을 이어받은 이들을 위해 일했습니다. 그러면서 기득권을 비판하다 받은 박해로 더욱 가난한 인민들과 가까워질 수 있었고, 삼부회에 출마해 혁명에 뛰어들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겁니다.


제 탓이 아닌 일로 나면서부터 짊어져야 했던 불명예는, 그것을 무고하게 박해 받는 약자들을 위해 일하게 하는 원동력으로 삼으려 하지만, 여전히 제 마음 한구석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여러분께서 보내주신 축하 덕에 한층 더 가벼워지는 기분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어떤 탄생이든 모든 인간은 같은 눈물로 태어나죠. (*Le cri de ma naissance) 모두가 같은 존엄한 존재로 태어나 서로를 도우며 함께 삶을 헤쳐나갑니다. 누구도 자신이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인해 비난받지 않고, 오직 자신으로서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오기를. 함께 그런 세상을 만듭시다.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왜 안 느껴 봤겠습니까. 하지만 언젠가는 그 날이 올 것임을 알기에 우리가 못 본다 해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선은 곧 진리요 이 세계와 인간의 법칙으로서 실존하는 것이기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지는 개별 인간, 정권, 사건 따위보다 오히려 더 확실하게 실재하기에,

오전 12:44 - 2018년 6월 6일 링크


정의는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다만 그 미래를 앞당기기 위해 싸울 뿐입니다. 그리고 인민들, 우리 형제들의 고통을 빨리 끝내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것이지요. 설령 실패하더라도 우리의 수많은 시도와 노력은 후세에 본보기와 밑거름이 될 것이며, 우리는 명예롭게 패배할 것입니다.


* 사실 제가 좋아하는 <레 미제라블>의 배경인 1832년 6월 5-6일 파리 봉기가 일어난 날이라 그 명예로운 실패를 기리는 의미에서 적어본 트윗입니다. 레 미제라블 아베쎄의 벗 봇님들(유저계 링크)이 알아채고 알티해주셔서 기뻤어요 ㅎㅎ




브루투스는 카이사르를 죽인 이유가 카이사르에 대한 자신의 사랑이 모자라서가 결코 아니라 로마를 보다 더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브루투스의 사랑은 진심이었고 카이사르 역시 정말 자상한 아버지와 같았습니다. 친구들에게도 유쾌하고 친절했을 테고요. 그러나 그런 개인으로서의 인간미가

오전 12:10 - 2018년 6월 17일 링크


독재자로서 단죄돼야 할 정당성을 상쇄하진 않습니다. 제가 의원이 되기 전 변호사 시절에 맞서 싸웠던 특권층의 변호사들 중에선 우정을 나누었거나 은혜를 입은 동료 법조인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래서 냉혈하고 배은망덕한 자라는 말도 들었죠. 허나 사사로운 정을 공공선에 앞세울 수는 없기에,


보호자 없는 인민을 내버려두고 정실주의의 장막을 칠 수는 없기에, 저는 옛 친구들의 다정함을 잊었습니다. 여러분은 저와 직접 얘기 나누며 저를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라고 평가해주시기도 하죠. 감사한 일입니다. 하지만 정치인으로서의 저에 대해서는, 제가 한 일을 통해서만 판단하셔야 합니다.


귀족들도 아주 의식적으로 악랄하게 구는 자는 소수이며, 퍽 많은 수는 딱히 악의는 없고 개인적으로 교류하면 선량하고 친절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귀족이라는 신분 자체가 무위도식하며 인민이 생산한 것으로 먹고 살기에 인민을 착취하는 데서 성립하며, 자신을 인민과 구분짓기 위해


자신이 자유롭게 하는 것을 인민에겐 제한하므로 인민의 권리를 억압하는 데서 성립하죠. 해서 우리는 귀족 개개인을 일부러 보지 않으며 귀족 집단 전체에 계급적 증오를 보내는 것입니다. 하층 인민은 어떻습니까? 생계를 위한 고된 노동으로 소진한 사람들은 다정하게 굴 여유가 있을 리 없습니다.


자신을 희생하는 덕성은커녕 자기 것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서로 다투고 욕하곤 하며 나아가 범죄에도 쉽게 빠져듭니다. 교양 있는 샌님이라면 개인적으로 만났을 때 쉬이 혐오감을 느낄 것입니다. 아! misérable은 비참하다, 가난하다는 뜻인 동시에 비열하다는 뜻이기도 한 것입니다...


(일종의 언어유희입니다. 제가 언어학에 문외한이라 정말로 어원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인민이란 계급적 속성 자체에 있어서 공공선이 무너질 때 가장 먼저 타격 받는 약자이기에, 인민의 이익이 곧 공공선이 되고 인민의 의지는 항상 공공선을 향하게 되며


인민은 공공선의 제1 수호자가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인민 개개인에 대한 도덕적 단죄를 하지 않고 인민 집단 전체를 동정합니다. 동정심은 인류애의 근간이지만, 개인의 현재 모습만 보고 그가 동정할 만한 모습을 보이는지에 따라 동정심이 발휘되게 내버려두면,


개인을 그렇게 몰아간 사회구조를 간과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은 본래 선하나 사회의 악이 그를 악덕으로 물들입니다. 사회가 선한 성품을 기를 기회를 주지 않고 억압만을 가하고 있는데, 부디 우리가 이미 가하고 있는 차별을 이유로 그들을 계속 차별해야 한다고 말하지는 맙시다.


* 사실 이 때 제주도에 도착한 예맨 난민들을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찬반 논쟁이 치열할 때라 그것을 의식한 트윗일까 추측하는 팔로워님들이 계셨는데요, 일단 일반론으로 쓴 트윗이고 해석은 보시는 분들 각자의 자유에 맡기겠습니다 ㅎㅎㅎ

Posted by 1789로베스피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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