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7:47 - 2014년 2월 13일 링크
@1789Robespierre 순환이라는 원의미처럼 청교도 혁명의 지도자인 크롬웰이 독재자가 되었다가 죽은 후 왕정이 복고되는 '되돌아감'을 가리키는 데 쓰이기도 했지요. 하지만 우리의 혁명은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을 거대한 도약이 될 겁니다!
오후 7:49 - 2014년 2월 13일 링크
@1789Robespierre 제가 대필한 아라스(Arras) 구두 수선공 조합의 진정서(cahiers)에서 보듯 우리 인민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받아 온 억압을 직시했고, 전국 삼부회 전 지방 삼부회 회의에서 자유로운 소통을 잠시 해 보았습니다.
오후 7:57 - 2014년 2월 13일 링크
@1789Robespierre 한 번 자유를 맛본 인민이 다시 압제로 돌아가는 것을 받아들일까요? "I'm never going back; the past is in the past!" youtu.be/moSFlvxnbgk
* 프랑스 혁명도 영국 청교도 혁명처럼 공화국이 되었으나 혁명 지도자가 독재자가 된 후 왕정이 복고되었죠. 그래서 로베스피에르가 올리버 크롬웰에 자주 비유됩니다. 집권기에 금욕주의적인 정치 문화를 이룬 것도 유사하고요. 하지만 다시는 되돌아가지 않을 거대한 도약이 된 것도 맞죠. 청교도 혁명도 명예 혁명을 거쳐 입헌군주제라는 돌이킬 수 없는 변화를 만들었지만, 프랑스 혁명은 구 체제를 더욱 철저히 파괴하며 단절을 이루었습니다. 부르봉 복고 왕정의 루이 18세도 혁명의 성과를 부정하지 못하고 입헌군주제를 실행했고, 혁명을 부정하고 절대 왕정을 부활시키려고 했던 그 후임 샤를 10세는 1830년 7월 혁명으로 퇴위되고 말았죠.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로베스피에르는 크롬웰을 군사독재자로 보며 압제자의 전형으로 연설에 인용하곤 했고, 자신은 독재자가 아니라고 끝까지 주장했습니다. 사실 로베스피에르는 법률적으로 보장된 독재권이 없었고 군대나 경찰 같은 안정된 독재의 기반을 가지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준(準)독재나 자코뱅 독재라고는 해도, 엄밀히 말해서 로베스피에르 개인의 독재는 아니었습니다. 정치적 성향도 달랐던 게, 크롬웰은 보통선거를 주장하는 수평파를 탄압했지만 로베스피에르는 보통선거를 쭉 주장해 1793년 산악파 헌법에 규정했고, 크롬웰은 프로테스탄티즘에 입각한 금욕주의적 정치였지만 로베스피에르는 루소적이고 공화주의적인 덕성으로 종교가 정치를 규정한 게 아니라 정치가 종교적 색채를 띠게 된 겁니다. 뭐...이런 차이가 있긴 한데 아무튼 혁명이 독재로 흐른 건 맞고 단기적으로 도로아미타불이 된 것도 부정할 수 없으니 참 비극적인 반복이죠.
* "I'm never going back; the past is in the past!(나는 절대 돌아가지 않아; 과거는 과거야!)"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Frozen)"에 나오는 노래 "Let it go"의 가사입니다. 돌아가지 않을 것이고 과거는 지금과 단절된 과거가 되었다는 그 말 자체가 공통될 뿐, 프랑스 혁명은 그런 동화적인 얘기와는 거리가 멀죠... 그냥 장난스러운 개드립이에요 ㅋㅋ 엘사에게는 좀 미안? ㅋㅋㅋ
----------
"Au palais Royal" http://youtu.be/CmsCitl2pR0 당통이 팔레 루아얄에서 시민들을 규합하겠다고 했는데, 아무리 봐도 여자들이랑 노닥거리는 것 같다. 데물랭, 당통 만나면 나한테 오라고 전해줘. 내가 화났다는 건 말하지 말고.
오후 7:13 - 2014년 2월 13일 링크
@1789Robespierre 왔구나, 당통. 여기 잠깐 앉아 봐. 너 팔레 루아얄에서...뭐? http://youtu.be/xuviugn0Q0g?t=52s … "Pic Et Pic"에서 나도 그랬다고? 그건 난 가만히 있는데 그 여자분이 잠깐... 왜 그렇게 웃는데!
오후 10:37 - 2014년 2월 13일 링크
1789Robespierre 똑같긴 뭐가 똑같아! 그렇게 능글맞게 웃지 마! 어딜 가? 이봐, 당통! 당통!! ...하아, 나 어쩌다 쟤랑 친해졌지? 내가 쟤 때문에 내 명에 못 살겠다... #5년_후_화병은_아니지만
오후 10:42 - 2014년 2월 13일 링크
* 실존 인물 당통은 이 뮤지컬처럼 쾌락주의적이고 여자를 자유롭게 많이 사귀었죠 ㅋㅋㅋ 실존 인물 로베스피에르는 금욕주의적이었고요. 로베스피에르가 하숙집 주인 맏딸과 약혼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는데 확실하진 않고, 동...정일 거라는 추측이 유력합니다 ㅋㅋㅋㅋㅋ 이 트윗들처럼 이 문제로 옥신각신한 적도 있을 것 같지 않아요? 로베스피에르가 쓴 개인적 메모에 '당통은 덕성이라는 말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매일 밤 자신이 아내와 함께 발휘하는 덕성보다 더 확실한 덕성은 없다고 익살스럽게 말했다.'라는 구절이 있어요. 그런데 당통파와 정치적 대립이 극심할 때 쓴 거라 그 뒤에 따라오는 구절이 '도덕의 관념과 이토록 무관한 사람이 어떻게 자유의 수호자가 될 수 있었는가?'...ㄷㄷㄷ 섹드립 실패하면 목 날아갈 수도 있군요...는 개드립이고, 주로 공포정치를 둘러싼 정치적 대립 탓이고 로베스피에르는 당통과 데물랭을 리스트에서 빼려고 꽤 오래 애썼다죠. 아무튼 결정한 뒤에는 단호하게 죽였어요. 5년 후를 생각하면 이 뮤지컬에서 사이좋은 모습이 참...
* 5년 후 화병은 아니지만 : 이 뮤지컬 배경인 1789년으로부터 5년 후 1794년, 4월 5일에 당통과 데물랭이 처형당하고 7월 28일에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당했습니다. 그 해 3월 24일 상퀼로트를 대변하던 에베르파(코르들리에파)를 처형한 뒤 상퀼로트 운동을 탄압하면서, 공포정치를 지지하고 더 강화하자고 주장하던 상퀼로트들과 혁명정부의 연결이 흐려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지나 공포정치를 끝내자고 주장하던 당통파(관용파)도 처형, 탄압하면서 중도파 및 우파 부르주아지를 새로운 기반으로 삼는 것도 거부했죠. 그렇게 사회적 토대가 옹색해진 것 때문에 에베르파적인 극좌파에다 중도파, 우파 모두 합세해 테르미도르 반동을 일으켰고, 파리코뮌의 봉기도 상퀼로트의 지지를 별로 받지 못해(모인 코뮌군이 많이 잡아야 1, 2천 명) 실패하면서 순식간에 몰락하고 처형당한 겁니다. 그러니 로베스피에르는 당통 때문에(그 때문만은 아니지만) 제 명에 못 산 셈이죠. ㅉㅉ
-----------
오늘이 발렌타인 데이군요. 데물랭은 뤼실 뒤플레시(Lucile Duplessis)라는 부잣집 아가씨와 사귀고 있는데, 데물랭이 돈도 명성도 없으니 뒤플레시 양 부모님의 반대가 심하다고 합니다. 몰래 만나 초콜릿을 받는 게 첩보 작전을 방불케 하더군요.
오후 7:09 - 2014년 2월 14일 링크
@1789Robespierre 소작농에다 혁명가이면서 귀족에다 왕실 가정교사인 아가씨와 사귀는 로낭도 비슷하고요. 당통과 마라는...문어 다리 같으니. 뭐, 혁명을 게을리하거나 방해하지 않는다면 사생활이 어떻든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니죠.
오후 7:12 - 2014년 2월 14일 링크
@1789Robespierre 저에게는 앙투아네트 데조르티(Antoinette Deshorties)라는, 고향 아라스에 두고 온 연인이 있는데, 삼부회가 순조롭게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총체적 혁명으로 치닫고 있어서...기다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오후 7:17 - 2014년 2월 14일 링크
@1789Robespierre 혁명이 완수되기 전까지는 파리에 새 터전 잡고 결혼 준비할 여력이 없을 테고, 마냥 기다려 달라고 할 수 없으니까... 괜찮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건 조국이니까요. #앙졸라스_표절ㅋ #얘가_걔의_모티브니까
오후 7:24 - 2014년 2월 14일 링크
@1789Robespierre 그런데 정말 포기한 걸까? 정식은 아니지만 결혼 약속했는데... 초콜릿은 당연히 못 보내겠지만 편지는...... 아니, 전 정말 괜찮습니다! #2년_후에_고향_가니_이미_결혼했더라_안_괜찮았음ㅉㅉ
오후 7:27 - 2014년 2월 14일 링크
* 혁명을 게을리하거나 방해하지 않는다면 사생활이 어떻든 제가 상관할 바는 아니죠 : 흔히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에게 도덕적으로 엄격했고, 남들에게도 그만큼의 도덕적 엄격함을 요구해서 그에 어긋나는 사람들을 마구 죽였다'라는 말들을 하죠. 하지만 사실 로베스피에르는 그런 류의 도덕성, 즉 개인적 금욕과 청렴을 기준으로 사형시키거나 처벌하지는 않았습니다. 파산한 사람을 자코뱅 클럽에서 추방하자는 주장에 반대하면서 공적 도덕과 사적 도덕을 구분했고, 개인적 도덕성이 의심스러워도 가는 방향이 달라지기 전까지는 협력하곤 했죠.(링크, 영어) 최고존재의 컬트(로베스피에르가 고안한 시민종교인데, 아래 다른 트윗에서 설명하겠습니다.)를 믿지 않는 사람을 자코뱅 클럽에서 추방하자는 주장에 반대하기도 했어요.(링크, 영어) 또, 당통이 방탕했던 게 어제 오늘 일이 아닌데 정치적 대립 전까지는 친하게 지내기도 했죠. 고나리질은 했어도요 ㅋㅋ
공포정치 때 로베스피에르가 '덕의 공화국'을 선언하긴 했습니다. 그런데 1794년 2월 5일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의 "정치도덕의 원리에 대한 보고서"(한국어 번역 링크)에서, 그 덕은 수도승 같은 금욕적인 것이 아니라 '국민과 그 법에 대한 사랑', '평등에 대한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그 후 5월 7일에 최고존재와 영혼 불멸을 인정하자고 제안한 보고서에서는 '입법자의 눈으로 볼 때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일상행활에서 도움이 되는 것은 모두 다 진리입니다.'라고 했고요. 그래서 제가 위에 "종교가 정치를 규정한 게 아니라 정치가 종교적 색채를 띠게 된" 것이라고 했죠.
하지만 '덕의 공화국'이 금욕적인 성격을 많이 띤 것은 사실입니다. 상퀼로트의 봉기가 있고서야 최고가격제를 도입했고 그것도 군수품과 빵에만 엄하게 적용되었고 나머지 물품들의 최고가격 위반은 잘 처벌받지 않은 것에서 보듯, 자코뱅들은 경제적 자유를 통념만큼 심각하게 침해하지는 않았습니다. 부르주아지를 혁명정부의 적으로 돌려서도 안 되었고 자코뱅 자신들도 중소 부르주아지에 속했으니까요. 하지만 93년 6월 2일 봉기로 자신들을 집권시켜 주었고, 총력전 상황에서 징집과 징발의 대상이자 국유 생산의 노동력이기에 혁명정부에 꼭 끌어들여야 했던, 상퀼로트의 평등주의적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자코뱅 자신들도 독립적 소생산자들의 사회라는 루소의 평등주의적 이상을 지니고 있었고요. 이렇게 경제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 중 어느 쪽도 놓을 수 없는 상황, 게다가 거의 전 유럽과 외전을 벌이고 국내 곳곳에서 내란이 일어나기에 국가의 모든 자원과 역량을 전쟁 수행에 쏟아야 했던 총력전 상황에서, 아마도 유일하게 가능했던 것은 '절제'(로베스피에르의 표현으로는 '명예로운 빈곤')였습니다. 생산력의 발달이 미약했고, 통계학은커녕 교통 발달도 미약해 국가의 정치·경제 제도를 과학적으로 조율하는 것도 불가능했던 이 시대에 달리 무엇이 가능했을까요? 평등을 챙기는 방법으로 복지국가도 공산주의도 당연히 불가능했죠. 자코뱅과 상퀼로트 몰락 후처럼 경제적 평등을 거의 포기하고 경제적 자유 체제로 가는 것도, 앞서 말한 상퀼로트 지지 기반과 전쟁 수행 때문에 당시로서는 불가능했고, 실제로 테르미도르파 국민공회 및 총재정부는 전쟁을 계속하면서 자유경제체제로 갔다가 굉장한 물가상승과 빈곤을 초래했고 정치적 불안정에 시달리면서 군대에 의존하다가 나폴레옹에 의해 몰락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덕의 공화국'은 청교도적, 스파르타적, 유토피아적 이상이라기보다는 달리 어쩔 수 없었던 현실주의적 방책이었던 겁니다.
윗 문단은 모두가 동의하는 해석이 아니지만 이 각주의 첫 문단은 사실입니다. 이 뮤지컬은 공포정치와 덕의 공화국이 등장하기 한참 전, 로베스피에르 자신도 아마 포함해 누구도 그걸 예측 못했을 1789년이니까, 방탕한 것 뻔히 아는 당통과 친했던 역사상과 이 뮤지컬상의 모습에 비추어 엄격한 개인적 도덕성을 강요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 앙투아네트 데조르티(Antoinette Deshorties) : 다음Daum 백과사전(브리태니커)에 '사촌인 앙투아네트 데조르티와 약혼했다는 소문이 있었을 뿐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Anaïs Deshorties라고도 하네요. 혈연관계는 아니고, 로베스피에르의 aunt(고모? 이모?) Eulalie가 재혼해 들어간 집의 전처 소생 딸이래요.(Peter Mcphee의 "Integrating Private and Public in the Life of Maximilien Robespierre", pdf 파일 링크) 여동생인 샤를로트 로베스피에르의 회고록(영어 번역문)에 따르면, 삼부회 제3신분 대표로 선출되었을 때 2년이나 3년동안 사귀고 있었고 결혼 얘기도 여러 번 나왔는데, 로베스피에르가 제헌의회 활동하던 사이에 다른 남자와 결혼했고, 로베스피에르는 제헌의회 해산 후 아라스에 돌아와서야 알았는데, 엄청 충격받았다(he was very grievously affected)고 하네요 ㅉㅉ 로베스피에르가 데조르티에게 기다리지 말라고 했다는 건 제 창작인데, 그런 말 안 했어도 정치 하느라 여념 없었으니 사실상 기다리지 말라고 한 거나 다를 바 없죠 ㅋㅋㅋ...ㅉㅉ
------------
발렌타인 데이의 유래는, 로마 황제가 원정을 떠나는 병사의 결혼을 금지했는데 성 발렌티누스(Valentinus)가 몰래 결혼시켜 주다가 사형당한 것입니다. 성 발렌티누스는 사랑의 성자이자 자유의 성자인 거죠.
오후 7:31 - 2014년 2월 14일 링크
@1789Robespierre 루소의 <신(누벨) 엘로이즈> 속 귀족 처녀와 평민 청년의 이룰 수 없는 사랑도 그렇고, 우리 동지 로낭과 올랭프 양도 그렇고, 억압적 체제에서는 사랑조차 자유롭지 못한 겁니다. #공포정치_때는_귀족과_사귀다_의심받기도
오후 7:35 - 2014년 2월 14일 링크
@1789Robespierre 연인에게는 사랑이, 인류에게는 형제애(Fraternité)가 있기를. 남은 발렌타인 데이 즐겁게 보내십시오.
오후 7:38 - 2014년 2월 14일 링크
* 공포정치 때는 귀족과 사귀다 의심받기도 : 에베르파 쪽이었던 과격 혁명가 탈리앵(Jean-Lambert Tallien)이 귀족인 카바뤼 부인(Thérésa Cabarrús)가 사귀다 의심받았고 실제로 수감된 그녀를 구하기 위해 테르미도르 반동을 주도했습니다. 그 외에도 귀족과 사귀다 의심받았던 인물들이 있었는데 기억이...^^;; 아무튼 공포정치는 확실히 의심암귀의 상황이었어요. 혁명 처음부터 과격 급진 성향의 하층민들 사이에 '압제자에 대한 처벌 의지'와 '반혁명으로부터 위협받고 있다는 위기 의식'이 있었고 대내외적 위기가 극심해지며 그 처벌 의지와 위기 의식이 강해졌다고 설명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방데 초토화 작전이 방데 봉기를 더 끈질기게 만들고 그 후로도 가장 반동적인 지역으로 만든 것처럼 혁명정부에 대한 반대가 더 강해졌고, 많은 사람이 죽었으며 분위기가 흉흉해졌고, 무고한 사람들도 죽었으니...끔찍하고 비극적이죠.
---------------
오늘은 자신의 조국을 식민 지배하려던 자를 처단한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은 날이기도 합니다. 불법 테러? 압제에 대한 저항을 법적 형식에 맞추는 것은 폭정에 대한 최후의 미화입니다! 자유를 위해 싸운 모든 이들께 존경과 감사를 바칩니다.
오후 7:50 - 2014년 2월 14일 링크
@1789Robespierre 부끄럽게도 우리 프랑스에도 식민지가 있습니다. 생도밍그(Saint-Domingue)인데, 그곳 흑인 노예들의 처지가 참으로 비참하다더군요. 후에 국민의회에서 이 문제에 대해 발언할 기회가 생기면 이런 연설을 할 겁니다.
오후 7:53 - 2014년 2월 14일 링크
@1789Robespierre "여러분의 행복, 영광, 자유를 대가로 치르며 분투한다 해도 식민지는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 국민은 식민지 노예주들을 위해 국민도, 식민지들도, 인류 전체도 희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1791년_5월_13일_연설
오후 7:59 - 2014년 2월 14일 링크
@1789Robespierre #얘_집권_때_노예제_폐지 #사실_국내_정파_싸움을_우선시해서_미온적이었음 #아이티_혁명을_도운_판무관_송토낙스가_지롱드파라서 #ㅉㅉ
오후 8:14 - 2014년 2월 14일 링크
* "압제에 대한 저항을 법적 형식에 맞추는 것은 폭정에 대한 최후의 미화" : 로베스피에르가 1793년 4월 21일에 발표한 인권선언(인간과 시민의 권리들의 선언) 초안의 한 구절입니다. 제30조의 일부인데 전체는 못 찾았고 장 마생의『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에 인용된 건 '압제에 대한 저항을 법률적 형식에 종속시키는 것은 전제정에 대한 최종적인 장식이다. (중략) 민중이 선량하고 관리들이 타락할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하지 않는 모든 제도는 사악한 것이다.'입니다. 1793년 6월 24일에 공포된 산악파 헌법의 전문 인권선언의 기초가 되었죠. 생쥐스트가 제안으로 '프랑스는 평화가 올 때까지 혁명적이다'라고 선언하며 프랑스는 입헌 체제가 아니라 혁명 체제라고 선언함으로써, 이 산악파 헌법은 시행되지 않고 '언약의 궤'에 보관됩니다. 그래도 인권선언은 공공장소에 걸려 홍보되었죠. 이 제30조과 소유권의 제한성을 규정한 제9~11조, 억압받는 다른 국민들을 형제애로써 도와야 한다는 제33~36조는 산악파 헌법에 반영되지 않았습니다.
* 아이티 혁명 : 현재의 아이티는 프랑스 대혁명 당시에는 생도밍그(Saint-Domingue)라고 불렸습니다.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흑인 노예들을 이용한 사탕수수 경작이 성행해 프랑스에 많은 부를 가져다 주었죠. 이 흑인 노예들이 받는 학대는 말로 다 못할 지경이었는데, 자세히 알고 싶으시다면 시 엘 아르 제임스의 『블랙 자코뱅』을 추천합니다. YES24 판매페이지에서 미리보기 할 수 있는 앞쪽에 아이티 혁명의 원인이 된 흑인 노예들의 고통이 잘 나와 있어요. 아이티 혁명과 자체에 대해서도 잘 설명되어 있다더군요.
로베스피에르는 트윗한 1791년 5월 13일에 물라토(유색인이라고 흔히 번역, 흑인과 백인의 혼혈인)의 정치적 지위 개혁을 주장한 연설과 그 해 9월 24일 자유 물라토의 투표권 옹호 연설, 그리고 1793년 인권선언 초안에서 재산권에 도덕적 원칙이 있어 본 적 없는 자들의 예로 노예주들을 든 것('인권운동사랑방 인권오름'에 있는 번역과 해설)을 보면, 노예 제도와 식민 제도에 대해 도덕적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의회 활동을 하며 그 문제에 그리 많이 개입한 것은 아니었고, 노예제 문제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것은 후일 지롱드파의 지도자 브리소가 설립한 '흑인의 벗 협회'의 후일의 지롱드파 인사들이었습니다. 이들도 아주 적극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나마 프랑스인 중에서는요.
게다가 이 일련의 트윗들 중 마지막 트윗에서 말했듯, 집권기의 산악파는 이 문제에 대해 미온적이었습니다. Robert Louis Stein, L. F. Sonthonax의 『The Lost Sentinel of the Republic』(마룬 님의 정리글 참고했음)에 따르면, 프랑스 정부를 대표해 파견된 판무관인 송토낙스와 폴브렐은 파견 전 지롱드파에 가까웠고(그렇게 깊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노예주들의 식민지 자치권력에 대항해 프랑스 본국 권력을 키우면서 흑인 노예들의 반란을 지원했습니다. 쫓겨나 프랑스로 온 노예주 식민주의자들은 노예제 폐지에 대해 가장 적극적이었던 지롱드파에 대한 반감이 컸고, 집권 후 지롱드파의 영향력을 더 확실히 제거하고 싶었던 산악파는 이들과 동맹을 맺었죠. 그리고 송토낙스와 폴브렐을 지롱드파이자 흑인들에게 왕으로 추앙받던 폭군(실제로 공화주의에 대한 이해가 전무했던 흑인들이 그들을 왕이나 신처럼 떠받들긴 했지만)이라며 체포하기로 결정했고, 송토낙스가 파리로 보낸 여섯 명의 대표들도 체포했습니다. 그 대표들은 곧 풀려났고 94년 2월 4일에 그들이 참석한 가운데 국민공회는 박수갈채와 감동의 물결 속에서 모든 식민지의 노예제를 폐지한다는 법령을 결정했습니다만, 송토낙스와 폴브렐 체포령은 취소하지 않았죠. 그런데 송토낙스와 폴브렐이 체포되어 프랑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난 뒤라서 살았습니다.
글쎄요, 전 유럽과의 전쟁에다 국내 경제 및 재정 상황도 나빴던 와중에, 프랑스의 전체 83개 데파르망(département, 프랑스의 지역 단위 세 수준 중 가장 큰 레지옹région과 가장 작은 코뮌commune 사이) 중 60개에서 지롱드파가 왕당파와 연계하기도 하며 반란을 일으키던 상황임을 생각하면 지롱드파 의심 세력에 대한 과민반응이 전혀 이해 안 되는 것은 아니고, 아무튼 간에 노예제를 철폐한 것은 공헌이긴 하지만... 아이티 혁명은 프랑스 혁명의 이상(理想)의 영향은 받았을지라도 그 혁명을 이루어낸 것은 흑인 노예들 및 그에 협력한 물라토들이며 아이티 혁명은 그들 스스로의 혁명이고, '블랙 자코뱅'이라는 말은 프랑스의 자코뱅들에게 과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보름달에게_소원을_빌어보자 이 프랑스 혁명이 성공적으로 완수되어서, 자유롭고 평등한 모든 시민이 형제애 속에서 사는 세상이 되기를!
오후 11:34 - 2014년 2월 14일 링크
@1789Robespierre 그런 행복한 세상은 반드시 옵니다! 우리의 혁명은 그걸 앞당기는 거죠! 만약 실패한다 해도...앞당기는 데에 잠시 실패하는 것일 뿐, 결국 오게 되어 있어요. 루소의 말대로 인간의 본성은 선하니까, 이미 자유를 아니까요.
오후 11:48 - 2014년 2월 14일 링크
@1789Robespierre 소원을 비는 게 비합리적이고 미신적으로 보일까요? 하지만 저는 우리를 돌봐주시고 밝은 미래로 이끌어주시는 신, 최고존재(l'Être suprême)를 믿고 있습니다. 인민에게는 자신이 받는 억압이 현세가 아니면 사후에라도
오후 11:51 - 2014년 2월 14일 링크
@1789Robespierre 사라질 것이고, 자신을 억압해 온 자들이 현세가 아니면 사후에라도 벌 받을 것이라는 믿음, 위로가 필요합니다. 루소도 시민종교의 필요성을 말했고, 칸트도 선이 행복으로 보답받게끔 영혼불멸과 신을 요청했죠.
오후 11:57 - 2014년 2월 14일 링크
@1789Robespierre 가톨릭의 신이 아니라서 불경스럽게 보일까요? 글쎄요,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인들에게 신을 믿지 않는다고 고발당했지만, 그는 변덕스러운 그리스 신화의 신들 대신 정의를 보장하는 참된 신을 신실하게 믿었습니다.
오전 12:01 - 2014년 2월 15일 링크
@1789Robespierre 저 역시 성경의 잔인하고 변덕스러운 신 대신, 인류를 정의로 이끄는 이성적인 신을 믿고 있습니다. 고대 로마 공화국 멸망 후 2천 년 가까이 존속한 압제를 깨는 이 힘든 과업을 위해선 강한 확신과 용기가 절실합니다.
오전 12:08 - 2014년 2월 15일 링크
* 루소(Jean-Jacques Rousseau)의 시민 종교 : 루소가 『사회계약론』 4권 8장에서 말한 시민 종교(Religion civile)란 시민들이 자신의 의무를 사랑하게 만들고, 국가에 권위를 부여하고, 시민들이 국가를 통합시키는 사회적 유대의 한 형태입니다. 주권자는 영적 세계에 대해 아무 권한도 없으며 그저 좋은 시민, 좋은 국가를 만드는 데 유용한 것을 교리로 삼을 뿐이므로, 이 시민 종교는 보통 말하는 종교의 교리와는 다르다고 루소는 말했죠. 시민 종교에 필요한 교리는 신의 존재, 내세, 선인들의 행복과 악인들에 대한 벌, 종교적 비관용의 배제(the exclusion of religious intolerance)입니다. 이상 루소의 『사회계약론』 4권 8장과 위키백과 '시민 종교' 항목을 참고해 적었습니다.
* 칸트(Immanuel Kant)의 영혼불멸과 신 요청 : 칸트는 무조건적, 무제약적으로 선한 것은 선의지, 즉 이성이 옳은 것으로 규정하는 것만을 행하고자 하는 의지 뿐이라고 했습니다. 경향성, 즉 행복해지고자 하는 욕구나 기타 욕구에서 나온 행위는 도덕적 가치를 가지지 못하며, 오직 의무에서 유래하는 행위만이 도덕적 가치를 지닌다고 했죠. 행위의 도덕성은 동기가 기준이지, 결과를 가지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고 했고요. 하지만 도덕적 의지는 자신의 도덕성이 완성되기(최상의 선)를 바라고, 또 완성된 도덕성에 상응하는 행복도 얻게 되기(최고선)를 바랍니다. 그런데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현세에서 최고선을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최고선이 실현 가능하기 위해 갖추어져야 한다고 칸트가 생각한 조건이, 첫째로 인간의 영혼이 무한히 존속하며 그 인격적 동일성이 유지된다는 영혼불멸, 둘째로 행복을 부여하는 창조주 신의 존재입니다.
* 최고존재의 컬트(Culte de l'Être suprême) :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 국민은 최고존재의 존재와 영혼의 불멸을 인정한다'로 시작되는 법령을 제안하면서 고안한 시민 종교입니다. 앞서 루소와 칸트가 말했던 내용이고 많은 혁명가들이 지니고 있던 관념이라 로베스피에르가 지어낸 것은 아닌데, 이게 그대로 국가의 공식 종교가 된 것은 처음이었죠. 공식 종교라는 거지 모든 국민에게 강제되는 국교는 아니었고 프리메르 16일(1793년 12월 6일)에 입법한 '예배의 자유' 즉 종교의 자유는 유지되었습니다. 프레리알 20일(1794년 6월 8일)에 이 법령에 따른 '국민 축제'가 벌어졌죠. 이 최고존재의 컬트가 내용 자체로 통념만큼 황당하고 갑작스러운 건 아니라고 봅니다. 하지만 과격 상퀼로트 운동을 탄압하고 상퀼로트들의 물질적 요구를 들어주지 못해 사회적 기반이 옹색해진 상황에서 그런 정신적, 도덕적, 추상적인 단결을 호소하는 방법 밖에 안 남아 있었다는 거라 참 희비극이었죠. 또 혁명가들 중 무신론자들도 많았던지라 그들의 불만도 많이 샀고, 국민공회 의장으로서 축제를 주재하는 모습이 로베스피에르의 권력욕으로 비쳐서 반발을 많이 샀습니다.
그건 그렇고, 로베스피에르는 그 전부터 그런 최고존재에 대한 믿음을 천명했습니다. 1791년 겨울부터 1792년 봄까지 프랑스 혁명에 적대적이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선전포고를 하자는 주장이 강해졌습니다. 자코뱅 클럽 안에서 브리소파, 후에 지롱드파가 되는 이들이 혁명 정신의 수출을 내세우고 은근히 외국의 부를 가져와 국내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혁명전쟁을 앞장서 주장했고, 이들의 주장이 부르주아지와 하층민 모두의 높은 지지를 받았습니다. 로베스피에르는 국내의 반혁명을 먼저 분쇄할 필요성과 군사독재의 위험성을 이유로 반대했고, 초기에는 마라, 당통, 데물랭 등의 지지를 받았으나 워낙 전쟁이 대세라 그들이 포기한 상황에서 3월 말까지 계속 반대했습니다. 그러던 중 오스트리아 황제 레오폴트 2세가 죽은 후 3월 26일에 자코뱅 클럽에서 다시 전쟁을 반대하며 신이 레오폴트를 벌함으로써 적들의 계획을 좌절시켰다고 말하자, 브리소파의 귀아데가 신을 언급하는 것은 민중을 미신의 속박 아래 두는 데 일조하는 것이라고 공격했고 자코뱅 클럽의 다른 회원들도 가세해 그를 침묵시켰습니다. 그에 대해 로베스피에르는 제헌의회에서 많은 적들에게 둘러싸여 있던 자신에게 신에 대한 믿음은 불가피했으며 신에 대한 믿음은 민중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하며 반박했죠. 로베스피에르가 믿었던 '최고존재'는 혁명의 수호신, 자유와 평등으로 인류를 이끄는 이성적인 신이었던 것이고, 보통의 신앙과 달리 자신과 민중에게 '필요했기에' 가졌던 종교적 감정이었습니다.
* 인민에게는 자신이 받는 억압이 현세가 아니면 사후에라도 사라질 것이고, 자신을 억압해 온 자들이 현세가 아니면 사후에라도 벌 받을 것이라는 믿음, 위로가 필요합니다. : Ruth Scurr의 로베스피에르 전기 『Fatal Purity: Robespierre and the French Revolution』에 대한 Hilary Mantel의 리뷰 "If you’d seen his green eyes"(링크)의 이런 구절에서 따온 겁니다. "그의 진심의 동일시는 가난한 사람들, 착취당하는 사람들, 희망 잃은 사람들에게였고, 이 동일시는 나중에 그가 혁명적 관념의 일부 가닥인 무신론을 맹렬히 거부하게 만들었다. 당신이 완벽한 사회를 창조할 수 없다는 것 ― 적어도 하룻밤 사이에는 불가능하다는 것 ― 을 고려하면, 당신은 인민이 신앙의 위로를 찾을 수 있게 내버려두어야 한다. 우주가 도덕적으로 맹목적이라는 것을 인민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이었다. 인민은 자신들을 박해한 사람들이 이 세상이 아니면 다음 세상에서라도 벌받을 것이라고 생각해야 했다."(His whole-hearted identification was with the poor ~ in the next world if not in this.)
---------------
#밤이니까_솔직한_얘기를_털어보자 ("Hey Ha" 전에)로낭이 의회는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한다고 따지면서, "당신들 아버지는 멀쩡하니까"라고 했는데, 내 아버지는 내가 8살일 때 가출했어. 그 2년 전엔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알지도 못하면서!
오후 10:53 - 2014년 2월 17일 링크
그 후로 공부는 장학금 받아서 겨우 하고, 헤진 옷 입고 다닐 정도로 가난했다고. "당신같이 돈 많고 부패한 작자들은 항상 싸우는 척만 한다"라고? 생존이 힘든 지경까진 아니었지만 돈이 많은 건 절대 아니었거든! 게다가 '부패'?! 나 변호사 시절에
아르투아 봉건제의 핵심 권력인 수도원의 비리를 고소했다가 의뢰 끊기고 판사들한테 밉보여서, 변호사 일 하면서 모은 약간의 재산도 거의 까먹고 푸셰(Fouché)라는 친구한테 여비랑 옷값 빌려서 겨우 파리로 왔다고! #그_친구가_테르미도르_반동_주도
내가 억울해서, '부패할 수 없는 자(l'Incorruptible)가 내 별명, 아니 대명사가 되게 만들고 만다! #이루어졌음 싸우는 척만 한다고? 일단 의회에서 평화적,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고 안 되면 인민을 조직해서 싸울 거야.
그런 때가 오면 내가 얼마나 단호하게 싸우는지 보라고! 내가 과거사를 얘기 안 하긴 했지만 모르면서 나에 대해 단정 짓지 마. You know nothing of Robespierre! #레미제라블 #The_Confrontation
사실 로낭 네가 오히려 부러워. 네 아버지에게 너희 가족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존재였잖아. 내 아버지에게 나와 우리 가족은 뭐였지? 그저 귀찮은 짐이었을까? 내 아버지는 멀쩡할까? 나와 세 동생을 버려 두고 나가서 멀쩡할까? 생사도 모르고 있어.
솔직히, 아버지가 안 멀쩡했으면 좋겠어. 내 여동생 앙리에트(Henriette)가 80년에 겨우 19살 나이로 죽었는데...자기 딸이 죽은 것도 모르고 또는 알면서 안 온 거라면 절대 용서치 못할 거야..! #1777년에_죽은_게_1958년에_밝혀짐
무책임한 아버지! 우리 남매가 행복했으면 모를까, 어머니를 잃고 너무나 불행했는데... 난 절대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이 혁명이 가장 힘들고 끔찍한 국면으로 흐른다 해도, 끝까지 나의 책임을 다하며 혁명과 운명을 함께 하겠어! #이루어졌음 #ㅉㅉ
에라이, 마저 털자! 당통 너 그렇게 무분별하게 여자들 건드리면 못써! 그러다 사생아라도 생기면? 내가 속도위반으로 임신된 바람에, 친가 친척들이 내 부모님 결혼식에 참석 않았고 뒷소문도 많이 나돌았어. 사생아의 신세는 오죽하겠어?
이 혁명이 입헌 국가를 세우는데 성공한다면, 서자와 사생아도 가족으로서의 평등한 권리를 갖도록 애쓸 거야. 인간은 자신의 재능과 덕성으로 평가받을 뿐,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일로 인해 낙인 찍혀선 안 돼. 가정 안의 '가부장의 전제'도 사라져야 하고.
...죄송합니다. 감상적인 얘기를 늘어놓았군요. 그래도 그런 불행한 어린 시절 덕에 빈민들에게 동정심과 연대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가장 비참한 이들이 행복해질 때까지 싸우겠어요! '우리는 저 끝으로 떠나길 원하네.'("Pic Et Pic")
------------
twitter.com/1789Robespierre/status/435416679233757184 … ‘일단 의회에서 평화적,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만큼 해보고 안 되면 인민을 조직해서 싸울 거야’라고 어제 말한 것에 대해 보충 설명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오후 10:59 - 2014년 2월 18일 링크
우선 선언하건대, 정의, 자유와 평등, 덕성 등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인민에게, 그리고 오직 그들에게만 속하며 그 반대의 악덕들은 부와 권력으로 인해 부패한 자들의 것입니다. 일견 야만스러워 보이는 그 하층민들의 분노 속에 정의가 있으며,
오후 11:00 - 2014년 2월 18일 링크
그들의 심판은 법정의 판결만큼 가치 있습니다. 하지만 민중봉기는 불확실한 방법이며 실패할 경우 무서운 반동을 불러오는 법입니다. 그래서 인민이 직접 심판하러 나설 수밖에 없게 되기 전에, 의회에 있는 인민의 대리인들이 먼저 인민의 요구를 법과 제도로써
오후 11:02 - 2014년 2월 18일 링크
안정되게 실현해야 한다는 겁니다. 국왕이 국민의회를 인정치 않는 지금처럼 합법적 방법이 불가능해진 상황이라면, 인민의 무력을 조직하고 이끌어서라도 정의를 실현해야만 합니다. 허나 그런 불가피한 상황이 오기 전에 합법적 절차를 깨는 것은 무모합니다.
오후 11:04 - 2014년 2월 18일 링크
그렇다고 로낭 말대로 우리가 말만 앞세운다거나 인민의 자발성을 무시한다고 생각지는 말아주십시오. 인민이 특권층의 음모나 가짜 애국파의 배신을 감시할 수 있도록, 민중운동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려는 모든 시도(계엄령 입법이라든가)에 맞서 싸우겠습니다.
오후 11:05 - 2014년 2월 18일 링크
그리고 민중운동이 일어나야 한다면 그것을 잘 이끌고 그 요구를 법 제도로써 안정적이고 효과적으로 실현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로낭, 안심해. 우리의 혁명은 위에서 끌어올리기도 하고 아래에서 밀어올리기도 하며 가장 높은 이상까지 오를 거야!
오후 11:06 - 2014년 2월 18일 링크
* 정의, 자유와 평등, 덕성 등 모든 가치 있는 것들은 인민에게, 그리고 오직 그들에게만 속하며 그 반대의 악덕들은 부와 권력으로 인해 부패한 자들의 것입니다. : 혁명전쟁을 둘러싼 논쟁으로 자코뱅 클럽이 후일 지롱드파의 맹아인 브리소파와 후일 산악파의 맹아인 로베스피에르파로 분열되었죠. 혁명전쟁 찬성론이 부르주아지와 하층민 모두의 높은 지지를 받았고, 혁명전쟁을 반대하던 로베스피에르는 인기가 떨어지고 브리소파의 공격을 많이 받았습니다. 브리소파의 귀아데가 자코뱅 클럽에서 로베스피에르가 민중의 우상이 되고 여론에 대한 독재를 행사했다며 스스로 자신에게 추방 처분을 내리라고 하자,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이 민중의 편이라고 연설하면서, 아라스에서 삼부회 대표를 선출하던 시기의 민중회의들을 보고 "민중만이 선량하고 공정하고 관대하며, 부패와 폭정은 그들을 멸시하는 모든 사람들의 배타적인 전유물이라는 진실을 이해"했다고 말하고 또 "나는 민중의 아첨꾼도, 중재자도, 웅변적 옹호자도, 보호자도 아닙니다. 나 자신이 바로 민중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혁명 초기의 로베스피에르는 민중이 그리고 민중만이 전적으로 선량하다고 생각하고, 자신과 민중을 동일시한 것 같습니다.
네, 물론 자신의 집권기에 보인 행동, 다시 말해 '공포정치'는 달랐죠. 민중 중에서도 방데(Vendée)의 농민들처럼 가톨릭적 정신상태 때문에 혁명정부에 반대하던 성직자들 편을 든 민중들, 온건했던 초기의 혁명의 지지해 급진화한 산악파 혁명정부에 반대했던 민중들을 진압했습니다. 심지어 공포정치를 지지했던 파리 상퀼로트 같은 과격·급진적 민중도 전쟁 수행을 위해 필수적이었던 국정의 안정성을 위해서라고 좋게 보든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서라고 나쁘게 보든 간에 탄압했고요. 이것 때문에 극좌파의 기반을 잃으면서 우파의 새 기반을 만들지도 않아 사회적 토대가 옹색해진 것이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산악파 혁명정부가 몰락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 일견 야만스러워 보이는 그 하층민들의 분노 속에 정의가 있으며, 그들의 심판은 법정의 판결만큼 가치 있습니다. : 로베스피에르는 1792년 12월 3일에 루이 16세의 합법적 재판에 반대하고 재판 없이 처형하라고 주장하면서, 1792년 8월 10일 봉기로 인민은 이미 국왕을 없앤다는 의지를 보였고 의원들은 인민의 대리인으로서 그대로 실행할 뿐 재판을 하며 죽일지 말지를 결정할 권리가 없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습니다. 그 연설 중엔 이런 구절이 있죠. "민중들은 재판소처럼 재판하지 않습니다. 민중들은 결코 판결을 내리지 않고 벼락을 내리칩니다. 민중들은 국왕들에게 유죄를 선고하지 않고 그들을 소멸시킵니다. 그리고 이 재판은 법정의 그것에 진정으로 상응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급진적 민중봉기(또는 상퀼로트 봉기)를 정당한 심판으로 여기는 태도는 혁명 처음부터 가지고 있었습니다.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습격에서 승리한 군중이 파리 근교에 주둔한 군대에 식량을 공급하는 일을 했던 초밀원 고문관 풀롱(Foulon)을 보복으로 잔인하게 살해했을 때, 로베스피에르는 '풀롱 씨는 어제 인민의 법령에 따라 처형당했다.'라고 메모했죠. 또 그 달 20일에 랄리톨랑달(Lally-Tolendal) 백작이 모든 민중운동을 진압하기 위한 무장 병력 사용을 목적으로 하는 동의안을 제출하자, 로베스피에르는 그에 반대하며 "파리의 이 봉기로부터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공공의 자유를 얻었습니다. 아마도 몇 명의 머리가 떨어졌지만 그것은 범죄자들의 머리입니다."라고 했습니다.
* 하지만 민중봉기는 불확실한 방법이며 실패할 경우 무서운 반동을 불러오는 법입니다. : 1791년 6월 20일에 국왕 가족이 오스트리아로 탈주하려다가 바렌느라는 마을에서 붙잡혀 파리로 돌아온 이후, 국왕은 '국민의 배신자'로 규탄받기 시작했고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세우자는 주장도 나오기 시작했습니다.[바렌느 탈주(배신) 사건] 그 해 7월 17일 샹 드 마르스(마르스 광장)에서 국왕의 폐위를 요구하는 청원 운동이 코르들리에 클럽(당통, 데물랭, 마라, 에베르 등이 있던 정치 클럽. 또 다른 정치 클럽인 자코뱅 클럽과 달리 처음부터 무산자, 하층민을 받아들여 하층민 중심적이고 급진적인 성향을 띠었다.)을 중심으로 벌어졌는데, 어느 쪽이 먼저 공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청원 운동을 벌이던 사람들과 그들을 통제하던 국민방위대(la Garde nationale, 국민군이라고도 번역) 사이에 계엄령이 내려졌고 국민방위대가 발포하여 수십 명이 죽었습니다.[샹 드 마르스 (학살) 사건] 한편, 그 전에 로베스피에르는 그 청원 운동에 반대하고 군주정이냐 공화정이냐 논의에도 끼지 않고, 의회의 합법적 재판으로 폐위시키자고 주장했죠. 7월 15일에 많은 군중이 몰려든 가운데 자코뱅 클럽도 청원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했을 때, 로베스피에르는 그게 민중들을 진압할 구실이 될지 모른다 생각해서 막으려고 했지만 결국 청원서를 제출하도록 결정되었고 로베스피에르는 마지 못해 합류했어요. 그런데 다음 날 저녁에 의회가 왕권 정지를 결정하자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 클럽이 청원을 철회해야 한다고 했고, 그 다음 날인 7월 17일 아침에 실제로 청원 철회를 얻어내고 샹 드 마르스로 자코뱅 클럽 대표들을 보내 모든 시위를 중단하라고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코르들리에 클럽은 자신들의 청원을 철회하기를 거부했고, 샹 드 마르스 사건이 일어났죠. 그 뒤로 한동안 샹 드 마르스 청원 운동을 주도했던 마라, 당통, 데물랭 등이 피신하고, 그들을 지지했던 급진적 신문들이 폐간당하고, 더 강도 높은 계엄령을 수립하는 법령이 통과되는 등 이래저래 급진파는 탄압을 당했습니다.
이렇듯 로베스피에르는 총체적인 변혁이나 민중직접행동을 되도록 피하고, 법 체제의 틀 안에서 당장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우선 시도했죠. 1792년 6월 20일 봉기에 대해서도 그랬습니다. 국왕이 롤랑 등의 지롱드파 인물들을 내각에서 사임시키자, 브리소와 페티옹 등의 지롱드파 인물들은 6월 20일에 민중봉기를 선동해 각료들의 복귀와 거부권의 철회를 요구했고, 민중들은 튈르리 궁으로 침입해 프리기아 모자(앞으로 접힌 붉은 색 모자로 혁명을 상징. 들라르쿠아의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속 자유의 여신이 쓰고 있음. 파파 스머프의 모자와도 똑같이 생김.)를 국왕에게 억지로 씌웠습니다. 하지만 아무 성과가 없었고, 오히려 민중봉기에 놀라 2만 명의 입헌군주파가 이 봉기 주동자들을 처벌하라는 청원서에 서명하는 등 급진파에 대한 반대가 커졌죠. 6월 20일 봉기 전에도 로베스피에르는 이에 반대하며 때 이른 움직임이 초래할 위험을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되도록' 피한다는 것이고 '할 거면 확실하게 성공시켜야지'하는 생각이라, 8월 10일 봉기에서 아예 왕을 끌어내리고 공화국과 새 의회(국민공회)가 만들어지는 데 역할을 했죠. 8월 10일 봉기에서 로베스피에르가 정확히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일단 밝혀진 건 봉기의 목표 제시, 연맹군(바스티유 습격 기념일 축제에 참여하러 모인 각 지역의 국민방위대 부대들)의 청원서 작성, 전체 연맹군의 비밀 지도부 창설 권고 및 그 지도부와의 접촉입니다. 이 정도면 봉기를 직접적으로 지도한 건 아니라도 뒤에서 꽤 중요한 역할을 한 게 아닐까 싶네요. 8월 10일 봉기를 지지한 건 확실하고요.
* 그래서 인민이 직접 심판하러 나설 수밖에 없게 되기 전에, 의회에 있는 인민의 대리인들이 먼저 인민의 요구를 법과 제도로써 안정되게 실현해야 한다는 겁니다. : 집권 전에 로베스피에르가 총체적인 변혁이나 민중직접행동을 되도록 피하고, 법 체제의 틀 안에서 당장 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우선 시도했다는 건 위에서 이미 설명했죠. 국민공회에서 지롱드파가 숙청되고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산악파(자코뱅파)가 집권했던 민중봉기에서도 그랬습니다. 로베스피에르는 민중봉기를 선동하면서도, 의회가 스스로 지롱드파를 쫓아내고 민중봉기는 그러도록 압력만 넣는 도덕적 봉기를 주장했는데, 그에 응해 일어난 1793년 5월 31일 봉기는 실패했습니다. 곧이어 6월 2일에 민중 및 국민방위대가 대포를 의회에 겨냥하고 협박하는 봉기가 일어나고서야 목표는 이루어졌고, 이 봉기는 로베스피에르 없이 마라와 파리코뮌(파리의 시민 자치행정기구)이 준비했습니다. 심지어 집권 후의 공포정치도 이런 류의 합법적 방법이었어요. 93년 9월 5일의 민중봉기의 요구에 따라 반혁명 혐의자를 규정하는 법이 생기고 그에 따라 반혁명 정치범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특별재판소인 혁명재판소가 가동되는 '법률적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는데, 과격 민중(상퀼로트)의 반혁명 처벌의지를 그대로 들어준다기보다는, 그런 민중운동을 억누르면서도 민중을 대신해 혁명정부가 합법적 장치를 통해 처벌하여 그들의 요구를 어느 정도 만족시켜주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국민공회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아 지방 반혁명 봉기를 진압하거나 처벌하러 간 파견의원들이 통제 없이 마구 학살하기도 했죠.
* 인민이 특권층의 음모나 가짜 애국파의 배신을 감시할 수 있도록, 민중운동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려는 모든 시도(계엄령 입법이라든가)에 맞서 싸우겠습니다. : 혁명 초기 제헌국민의회에서, 1789년 10월 21일에 로베스피에르는 민중봉기를 더 효과적으로 진압할 수 있게 하는 계엄령을 입법하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그 때 "그것은 귀족들이 열정적으로 오늘의 혁명을 무산시키려고 하고 있는 바로 이때에 민중을 물리치기 위해서입니다. (중략) 그것은 민중들이 반란을 일으켜 빵을 요구하는데, 우리는 빵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민중들을 학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연설했죠.
또 파리는 1789년 삼부회 선거를 위해 60개 지구(district)로 구획되었고, 파리 시민들은 선거가 끝난 후에도 지구별로 계속 회합을 갖고 토론하며 공공 업무에 참여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제헌의회는 1790년 5월 3일에 '지구의 상설화'를 폐지해 60개 지구를 48개의 구(section)로 대체했고, 그 결과 구들은 단순한 선거구가 되어 투표가 끝나면 곧 해산해야 했죠. 이 때 로베스피에르는 지구의 상설화 폐지에 반대하며 "구의 적극적인 감시가 없는데도 누군가 여러분의 활동을 지연시키기 위해 가장 효율적인 수단을 사용하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는 사람이 여러분 중 누가 있습니까?"라고 연설했습니다. 이런 행동들을 그를 의회에서 고립시켰지만 파리의 급진적 민중 사이에서 인기를 얻게 만들었죠.
이런 식으로 로베스피에르는 '공공의 자유를 해치는 음모'가 있다면서 급진적 민중의 힘을 유지시키고자 했고 그러기 위해 구 체제로 돌아가고자 하는 반혁명파만이 아니라 온건 혁명파도 공격했습니다. 그것을 로베스피에르 자신의 표현대로 '자유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의심'이라고 보든 자코뱅 집권기에 대해 부정적인 수정주의 역사가 퓌레와 리셰의 『프랑스 혁명사』에 나오는 표현대로 '질시적인 의심'이라고 보든 간에, 그리고 그 결과로 반혁명을 분쇄하고 혁명을 지켰다고 보든 급진적 민중을 강경하게 만들어 분열과 재앙을 초래했다고 보든 간에 말이죠.
-----------
twitter.com/1789Robespierre/status/435777338182082560 … 그제 제가 트윗한 '우리의 혁명은 위에서 끌어올리기도 하고 아래에서 밀어올리기도 하며'라는 구절을 보고 로낭이 묻더군요. "만약 위에서 끌어올리는 방향과 아래에서 밀어올리는 방향이 서로 다르면 어떡할 거야?"
오후 11:38 - 2014년 2월 20일 링크
저는 "오직 인민만이 항상 선량하니까 그건 위에서 잘못 이끌고 있다는 거겠지. 그 땐 대표자(의원)들을 설득하거나 강제하거나 갈아야지."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로낭이 "만약 네가 위에 있는데 아래에서 네가 원하는 방향과 다르게 밀어올린다면?" 하고
오후 11:41 - 2014년 2월 20일 링크
물었죠. 제가 웃으며 "내가 프랑스의 지배자가 되기라도 한단 말이야? 네가 나를 그렇게 높이 평가하고 있는 줄은 몰랐는걸!" 하고 대꾸했는데, 로낭은 여전히 심각하게 제 대답을 기다렸어요. 저는 한동안 고민하다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옳고 인민이 잘못
오후 11:43 - 2014년 2월 20일 링크
생각한 거라면 본래 선량한 인민이 잠시 길을 잃은 것 뿐이니 곧 해결되겠지. 인민이 옳고 내가 그른 거라면, 군주도 민심을 잃으면 몰락하는 법인데 나처럼 가진 게 없는 자는 오직 인민에게만 기대어 지도자의 자리에 올랐을 테니 아주 빠르게 몰락할 테고,
오후 11:44 - 2014년 2월 20일 링크
나는 아무리 비참하게 죽더라도 항의할 수 없을 거야. 그리고 만약 내가 옳든 그르든 간에 인민이 너무 오랫동안 그른 길로 간다면...나와 인민과 혁명이 모두 처참하게 무너지겠지." 그 후엔 별말 않고 헤어졌어요. 그런데 이성의 전진은 천천히 이루어지는
오후 11:47 - 2014년 2월 20일 링크
법이거늘 나 정도로 원칙적인 급진파가 대권을 잡을 리가 없잖아. 그렇게 멀리 가기 전에 내가 늙어 죽겠다. 로낭 이 친구는 일어나지도 않을 일로 쓸데없이 고민하게 만들어;; 저도 그런 소리 자주 듣지만, 로낭은 경계심이 너무 많다니까요.
오후 11:52 - 2014년 2월 20일 링크
* 인민이 옳고 내가 그른 거라면, 군주도 민심을 잃으면 몰락하는 법인데 나처럼 가진 게 없는 자는 오직 인민에게만 기대어 지도자의 자리에 올랐을 테니 아주 빠르게 몰락할 테고, 나는 아무리 비참하게 죽더라도 항의할 수 없을 거야. 그리고 만약 내가 옳든 그르든 간에 인민이 너무 오랫동안 그른 길로 간다면...나와 인민과 혁명이 모두 처참하게 무너지겠지. : 상기했듯이 여기서 말하는 인민은 정말로 프랑스 인민 전체가 아니라, 자코뱅 정권과 공포정치의 지지 기반이 되었던 파리의 급진적 상퀼로트 정도죠. 공포정치 기에 '가장 낮은 자'들이 유례 없이 권력에 굉장히 가까이 가긴 했으나, 광범위한 하층 다중 모두가 자코뱅을 지지했던 건 절대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혁명 때 가장 규모가 컸던 민중운동은 파리 상퀼로트 운동이 아니라 지방 농민들의 반혁명 봉기였다고 합니다. 그래도 파리 혁명정부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고 자신들을 집권시켜 준 파리 상퀼로트들이 가장 신경 쓰였겠죠. 그래서 로베스피에르가 '인민(민중)'이라고 할 때는 사실상 파리 상퀼로트들을 가리키는 듯 합니다.
자코뱅주의와 상퀼로트주의의 차이, 그리고 자코뱅 혁명정부와 상퀼로트의 갈등은 이 블로그 공지에서도 썼죠. 그러면서 상퀼로트와 혁명정부의 연결이 흐려지고, 당통파의 말대로 관용정책을 써서 우파의 새 기반을 만드는 것도 거부해 사회적 토대가 옹색해진 게 테르미도르 반동의 원인이 되었다고 이 글 두 번째 트윗들의 해석에 썼고요. 상퀼로트와 자코뱅 혁명정부의 분열은 어느 쪽의 잘못일까요? 상퀼로트? 자코뱅? 둘 다? 아무튼 로베스피에르는 테르미도르 반동 전날의 마지막 연설에서 죽어도 후회 없다는 식의 말을 한 것을 보나, 체포당한 후 공안위원회 탁자에 누워 있을 때와 단두대로 갈 때의 담담한 태도를 보나, 상퀼로트들을 원망하는 마음은 딱히 없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사람 속은 모르는 거니 확신할 순 없지만요.
아무튼 간에 테르미도르 반동 후 상퀼로트 운동은 제르미날과 프레리알 봉기의 실패까지 반동하는(부정적 의미가 아니라 그냥 중립적으로 이제까지의 급진화 방향과 반대 방향이라는 의미에서) 혁명정부에 맞서다 처절히 밟혀서 1830년 7월 혁명 전까지 파리에서 민중봉기는 사라졌습니다. '혁명이 무너졌다'라는 건 이의의 여지가 있을 것 같은데, 적어도 로베스피에르가 진정한 혁명이라고 생각했을 급진적·자코뱅적 혁명은 테르미도르 반동 때 끝난 게 맞죠. 그리고 그 후 1789~91년의 자유주의적·부르주아적 프로그램으로 돌아간 것을 혁명이 제자리로 돌아간 거라고(그리고 92~94년의 급진적·상퀼로트적 시기는 혁명의 일탈이라고) 보더라도, 테르미도르 반동 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나폴레옹의 통령정부 성립, 프랑스 혁명의 끝)까지 정치적으로 흔들려 군대에 의존하며 매년 쿠데타를 일으켜서야 겨우 정부를 유지하고 경제적으로 빈민들의 빈곤이 더 극심해졌다는 것을 보면, 자유주의적·부르주아적 프로그램으로 돌아가는 것을 제대로 못해서 나폴레옹이 혁명을 끝내고 나서야 혁명의 부르주아적 성과를 지킬 수 있었으니, 제 생각엔 온건한 조류까지 포함해 혁명 자체도 (5년의 시차를 두고지만) 무너진 것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 이성의 전진은 천천히 이루어지는 법이거늘 나 정도로 원칙적인 급진파가 대권을 잡을 리가 없잖아. : 로베스피에르는 혁명전쟁을 반대하면서, "이성의 전진이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중략) 시간이 흐르고 여러 다행스러운 상황이 겹치면서 이 혁명이 서서히 도래하지 않았더라면 미국의 경우처럼 그렇게 쉽게 우리의 족쇄를 깨뜨릴 수 있었을까요?"라고 했습니다. 전쟁을 통해 외국에 혁명을 이식할 수 없을 것이며, 외국 인민 스스로가 혁명을 원하려면 오랜 시일이 걸릴 거라는 말이었죠. 이게 원래 혁명이나 진보는 빠르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일반론을 말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바스티유 습격 전 국민의회에서 미라보의 위세가 대단했고 타협적이고 온건하게 마무리될 거란 예상이 우세했던 이 뮤지컬의 시점에서,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이 대권을 장악하게 되리라고는 절대 예상 못했을 거예요. 왕실과 귀족의 완강한 저항에 자극받아 하층민들의 급진적 조류가 급상승한 것, 혁명전쟁의 패배와 그로 인해 더 심화된 대내외적 위기로 인해 이전의 온건 혁명파들이 빠르게 몰락한 것 등의 예상치 못한 일들이 연이어 터지지 않았다면 자코뱅의 집권은 있을 수 없었을 테니까요. 삼부회 제3신분 대표로 뽑혀 파리로 오기 직전에 루소에게 바치는 헌사에서 '나는 다가올 몇 세기 동안 비교할 대상이 없을 이름을 남겨야 합니다. 전대미문의 혁명이 우리 앞에 펼쳐놓은 위험한 길 위에서 내가 당신의 글 속에서 끌어올린 영감에 변험없이 충실할 수 있다면 행복할 것입니다.'라고 썼는데, 자기가 프랑스의 지배자로서 이름을 날리리라는 게 아니라 '가장 단호한 반대자'가 되겠다는 각오 아닐까요? 만약 이 때부터 자기가 대권을 잡을 거라는 예상을 하고 있었다면 참으로 근거 없는 자신감인데 신기하게 들어맞은 것이겠군요 ㅋㅋ
------------
(리트윗) 네이(@repeat_inducir) : '혁명은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일으켰다.' 프랑스 혁명 보다가 나온 말인데. 민중의 벗도 그런 걸까.
오전 2:19 - 2014년 2월 15일 링크
twitter.com/repeat_inducir/status/434376470639558656 … @repeat_inducir 이런 식으로 우리 프랑스 혁명이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일부 사람들의 배만 불려주는 데서 끝날까 걱정하는 분들이 계시더군요.
오후 8:10 - 2014년 2월 21일 링크
악의적인 사람들은 '민중을 선동하는 건 사실 너희가 귀족의 자리를 대신하고 싶은 욕심 때문 아니냐'라고 하고요. 네, 타당한 걱정과 의심입니다. 모두를 위한 일을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려는 자들은 항상 있기 마련이죠. 하지만 우리 프랑스 혁명은
오후 8:12 - 2014년 2월 21일 링크
다를 겁니다! 어리석게도 귀족들이 왕권을 흔들어 루이 14세(절대왕정을 확립한)에게 뺏겼던 봉건적 특권을 찾으려는 목적에서 삼부회를 열게 해 이 혁명을 출발시켰죠. 그런데 민중이 주권을 회복하려는 것을 보고 후회하며 혁명을 멈추려드는 바람에,
오후 8:12 - 2014년 2월 21일 링크
민중은 더욱 강하게 저항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제 민중이 완전히 주권을 회복하고 최대한의 자유와 평등을 쟁취하는 그 궁극적 귀결로 가는 것을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겁니다. 민중의 전진을 멈추려 하고 혁명을 절반만 수행하려는 자에게 재앙 있으라!
오후 8:14 - 2014년 2월 21일 링크
이 프랑스 혁명은 바로 '빈자의 혁명'인 것입니다! #하지만_그_빈자의_혁명이_공포정치로_빠질_줄이야 #ㅉㅉ
오후 8:17 - 2014년 2월 21일 링크
twitter.com/repeat_inducir/status/434376470639558656 … 그나저나 '민중의 벗'이라고요? 마라 씨가 후에 신문 만들고 이름을 '민중의 벗(L'Ami du peuple)'이라고 붙인댔는데 우연의 일치일까요? #룬의아이들 #정말_거기서_따오셨나요_전민희_작가님?
오후 8:23 - 2014년 2월 21일 링크
* 어리석게도 귀족들이 왕권을 흔들어 루이 14세(절대왕정을 확립한)에게 뺏겼던 봉건적 특권을 찾으려는 목적에서 삼부회를 열게 해 이 혁명을 출발시켰죠. 그런데 민중이 주권을 회복하려는 것을 보고 후회하며 혁명을 멈추려드는 바람에, 민중은 더욱 강하게 저항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 바로 윗 트윗의 마지막 각주에 인용한 로베스피에르의 혁명전쟁 반대 연설이 전쟁을 통해 외국에 혁명을 이식할 수 없을 것이며, 외국 인민 스스로가 혁명을 원하려면 오랜 시일이 걸릴 거라는 말이라고 했죠. 그 근거로 프랑스 혁명은 서서히 도래했다면서, 고등법원 판사들, 귀족들, 성직자, 부자들, 즉 기존 특권층이 혁명을 출발시킨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부자들은 민중이 주권을 회복하려는 것을 보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거나 적어도 혁명을 멈추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혁명을 시작한 것은 그들입니다. 그들의 저항과 잘못된 계산이 없었더라면 국민은 여전히 전제정의 멍에 아래 있을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민중은 더욱 강하게 저항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트윗한 것은 로베스피에르가 실제 했던 말이 아니라, 제가 알베르 소불(Albert Soboul)의 『프랑스 대혁명사』에 나온 분석을 요약한 것입니다. 로베스피에르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는 모르겠네요^^;;
* 혁명을 절반만 수행하려는 자에게 재앙 있으라! : 공포정치기에 로베스피에르의 오른팔이었던 생쥐스트는 1794년 2월 5일 보고서에서 한 말입니다. "혁명을 절반만 수행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무덤을 판 것에 다름 아닙니다. 혁명은 스스로 자기 나라의 적임을 입증한 사람은 그 나라의 재산 소유자가 될 수 없다는 원칙을 인정하게 합니다." 이에 따라 생쥐스트는 반혁명 범죄로 처벌받은 사람들의 재산을 몰수해 적빈자들에게 분배한다는 '방토즈 법'을 제안해 통과시켰습니다. 사실 공포정치 기에 반혁명 범죄자들의 재산이 광범위한 빈곤을 해결할 수 있을 만큼의 규모는 아니었기에 시행된다 해도 효과는 제한적이었을 테고, 대단한 사회개혁 법안이라기보다는 극좌파 상퀼로트 운동의 지지를 로베스피에르파로 끌어들이려는 술책의 성격을 강하게 띤 것이었죠. 아무튼 로베스피에르와 그와 가장 가까운 동지들은 이 법을 시행하고자 했으나 공안위원회 내에서조차 반대에 부딪혀 시행되지 못했습니다.
로베스피에르는 집권 전까지 이런 식으로 혁명을 더욱 급진화해야 한다는 말을 여러 번 하긴 했습니다. 예를 들면 1790년 12월 5일 국민방위대에서 수동시민(연 3일치 임금에 해당하는 직접세를 납부할 수 없어 선거권을 갖지 못하는 시민)을 배제하자는 제안에 반대하면서, "이성과 자유에게 '거기까지만 가시오. 그들이 우리의 야심이나 우리의 개인적 이익을 위한 계산과 맞지 않는 지점에 도달하면 전진을 멈추시오.'라고 말하는 여러분은 누구입니까?"라고 했어요. 또 실제로 그런 급진화를 부추기는 행동도 했고요. 1792년 8월 10일 봉기에서의 역할이라든가, 1793년 5월 31일 봉기를 선동한 것이라든가요.
하지만 여러 번 말했듯 집권 후에는 상퀼로트 운동을 탄압하며 지나친(자기 생각에) 급진화에 제동을 걸려고 했죠. 그게 '자신의 야심이나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한 계산' 때문이었는지 그게 프랑스를 위한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요. 뭐...그런데 파리 과격 상퀼로트들의 엄격한 평등주의(모든 시민이 일정 이하의 토지나 하나의 상점이나 작업장만 가지자는 재산상한제 등)와 더 철저한 최고가격제 시행과 '반혁명 분자'에 대한 더 가차없는 처벌 등의 요구는, 실행가능성 떨어지는 것이라 받아들여 억지로 실행하려고 했으면 결과적으로 더 나빴을 거라고, 좌파적이든 우파적이든 20세기 이후 역사가들은 대체로 동의하더라고요. 교육 제대로 못 받고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상퀼로트들의 심정은 이해가 가니 그들이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폭력의 지나침과 결과적 실패에 대해 도덕적 비판을 가하자면, 권력도 능력도 있었던 혁명정부가 먼저 그 대상이 돼야 한다고 생각해요.
* 이 프랑스 혁명은 바로 '빈자의 혁명'인 것입니다! #하지만_그_빈자의_혁명이_공포정치로_빠질_줄이야 #ㅉㅉ : 1793년 7월 13일에 로베스피에르는 자기 친구였고 루이 16세의 사형 선고가 내려진 날(사형 집행 전날) 사형에 찬성 투표했다가 군주제주의자에게 암살된 르펠르티에(Lepeletier)가 쓴 국민교육안을 국민공회에서 읽었습니다. 재산에 비례해 징수한 특별 세금으로 거의 무상으로 제공하는 의무 교육이라는 르펠르티에의 생각에 찬성하면서, 그 국민교육안 보고서의 특히 이 구절을 감동한 채 읽었죠. "지난 3년 동안의 혁명은 전적으로 시민 가운데 어떤 다른 계급을 위한 것이었으며, 아마도 가장 궁핍한 사람들, 유일한 재산이라고는 노동밖에 없는 가난한 시민을 위해 혁명은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봉건제는 파괴되었지만 그들을 위해 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해방된 전답에서 그들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세부담은 공평하게 분할되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난한 그들은 거의 세금을 낼 수 없는 상태이다. 시민적 평등은 확립되었지만 그들에게는 교육이 부족하다. (중략) 여기에 바로 '빈자의 혁명(la Révolution du pauvre)'이 필요한 것이다." 트윗의 '빈자의 혁명'은 여기서 따온 겁니다.
네, 그 '빈자의 혁명'이, 정확히 말해 빈자 중의 일부인 과격 상퀼로트들이 권력에 가까이 다가가는 과정이 곧 공포정치가 도래하는 과정이 되었죠. 파리 상퀼로트 봉기의 압력으로 최고가격제, 징발과 징집 등의 통제경제정책이 채택되었고, 그걸 추진하기 위해 정부에 강제력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공포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공포정치가 아니었으면 강제력을 가질 수 없었다는 건 아니고(그 문제는 제가 아직 모르겠습니다), 공포정치가 그런 기능을 하긴 했다는 사실 지적일 뿐입니다. 음...사실 공포정치 이야기를 하다가 제가 폭력과 유혈을 찬양하는 사람으로 비칠까봐 염려가 되어서 글에 자꾸 사족이 붙고 지저분해지네요;; 죄송합니다.
------------#금방들킬_거짓말을_해보자 당통보다 제가 더 연애 경험이 많습니다. 마라 씨는 소심합니다. '팔레 루아얄의 꼬마(l’enfant du Palais Royal)' 샤를로트는 내향적인 성격입니다. 로낭은 남의 말을 잘 믿습니다.
오후 8:43 - 2014년 2월 21일 링크
* 당통보다 제가 더 연애 경험이 많습니다. : 당통이 쾌락주의적이고 여성 편력이 화려했다는 것, 반대로 로베스피에르는 금욕주의적이고 독신이었라는 것은 꽤 유명하죠. 이 뮤지컬에서도 당통이 여자들과 잘 어울리고 쾌락을 즐기는 게 "Au palais Royal"(유튜브 링크)과 그 다음에 데물랭에게 혁명이 좀 즐거웠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에서 드러나죠. 이 뮤지컬에서 로베스피에르의 금욕주의는 딱히 안 드러나요. 혹시 "Pic Et Pic"에서 여자가 뒤에서 안는데 가만히 있는 게 그걸 암시하는 걸까요? ㅋㅋ (유튜브 링크) 실존 인물 로베스피에르도 연애 경험이 없는 건 아닙니다. 위에서 말한 데조르티도 있고, 정치 하기 전 아라스에 있을 때 약혼했다는 소문이 몇 번 돌기도 했다고 합니다;; 여동생 샤를로트의 회고록에는 "내 오빠의 여성들에 대한 상냥함은 그녀들의 애정을 사로잡았다. 그 여자들 중 일부는 보통의 감정 이상의 것을 느꼈다고 나는 믿는다.(My brother’s amiability with women captivated their affection. Some of them, I believe, felt more than an ordinary sentiment for him.)"라는 구절이 있어요.(영어 번역문) 그래도 당통보다 연애 경험이 많을 리는 절대 없습니다 ㅋㅋㅋㅋ
* 마라 씨는 소심합니다. : 마라는 프랑스 혁명의 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급진적이고 과격했습니다. '인민의 벗(L'Ami du peuple)'이라는 자기 신문을 통해 '반혁명 음모'가 있으며 그것들을 가차없이 적발하고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혁명이 일어나기 10년도 더 전 <노예제의 사슬>과 <형법 초안>에 '부자와 빈자 사이의 적대감이 모든 정치적 현실을 지배한다, 법은 부자들이 자신들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만든 것이고 따라서 사악하다, 개혁에 대한 희망은 모두 몽상이며 유일한 해결책은 민중의 무장 봉기에 있고, 그에 따라 반란의 확실한 성공을 위해 독재적 사령부가 필요하다'라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반면 로베스피에르는 1784년 메스 아카데미 콩쿠르에 제출한 논문에서 '위험하게 마련인 총체적 혁명에서 특수한 악에 대한 치료책을 찾을 필요는 없다. 더 간단하고, 더 쉽고, 아마도 더 확실한 방법들이 우리 앞에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라고 썼죠. 1792년 1월 중순에 마라가 로베스피에르를 방문했을 때도 과격하고 폭력적인 방법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못하고 있어서, 마라가 그런 방법을 제안했을 때 얼굴이 창백해지며 말을 잃었다고 합니다. 마라는 이렇게 적었죠. "로베스피에르는 겁을 먹은 채 내 말을 들었다. 그는 창백해졌고 얼마동안 침묵을 지켰다. 이 만남은 내가 그에 대해 늘 품고 있던 생각, 즉 그가 현명한 의회 의원의 지식과 진정으로 덕 있는 사람의 공명정대함을 갖추었지만, 또한 정치가의 안목과 대담함을 갖추지는 못했음을 확인해 주었다." 결론적으로 마라는 소심한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로베스피에르가 마라 눈에 소심하게 비쳤을지언정 ㅋㅋㅋ 이 뮤지컬에서는 비중이 워낙 적어서 성격이 안 드러나네요.
* '팔레 루아얄의 꼬마(l’enfant du Palais Royal)' 샤를로트는 내향적인 성격입니다. : <1789: 바스티유의 연인> 공식 홈페이지의 샤를로트 소개(링크)는 이래요. 'Une gamine de Paris, « l’enfant du Palais Royal. » La capitale est son royaume, elle connaît tout et tout le monde la connaît. Elle sera une amie et soutien précieux pour les deux amants.' 구글 번역기로 영어로 번역해서 보니, '파리의 부랑아, "팔레 루아얄의 아이(꼬마)". 수도는 그녀의 왕국이다.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안다. 그녀는 두 연인의 귀중한 친구이자 지원이 될 것이다.'라는 뜻 같군요. 발이 엄청 넓고, 뮤지컬 속에서 그 정보력을 활용해 로낭과 올랭프에게 이런저런 소식을 전해줍니다. 그리고 "Au palais Royal"에서 당통이 안아 올리기도 하고 뽀뽀도 하는 걸 봐서(당통이 노래 끝나고 "샤를로트, 뽀뽀!" 하는 게 엄청 귀여워요 ㅋㅋ) 당통과도 친하고요.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다른 인물들과는 접점이 없네요.
* 로낭은 남의 말을 잘 믿습니다. : 로낭은 "Hey Ha" 전에(수정 버전에서는 "Hey Ha" 후, "Pic Et Pic" 전에) 데물랭, 로베스피에르와 다툴 때 "당신같이 돈 많고 부패한 작자들은 항상 싸우는 척만 한다"라고 하며 동지들에게조차 강한 불신감을 드러내죠. 그나저나 '부패할 수 없는 자(l'Incorruptible)'가 대명사가 된 로베스피에르에게 '부패한 작자'라고 하다니 ㅋㅋㅋ 그래서 로베스피에르가 발끈하는 수동 트윗(링크)을 해봤죠 ㅋㅋ
-----------#우리커뮤가_한_아파트에_산다면 아파트 관리비 사용 내역이 의심스러운데요? 동 대표, 집주인, 세입자 합동 삼부회를 엽시다! ...네? 동 대표 및 집주인과 세입자의 투표를 같은 가치로 인정치 않겠다고요? 무장하라(Aux armes), 세입자들이여!
오후 3:13 - 2014년 2월 22일 링크
* 아파트 관리비 사용 내역이 의심스러운데요? : 삼부회의 소집과 프랑스 대혁명의 시작의 직접적 계기는 재정 문제였습니다. 돈 많은 1, 2신분 특권층은 세금을 매우 적게 내고 대부분의 세입을 제3신분이 담당했죠. 제3신분 중에서도 돈 많은(일부는 귀족들보다도) 부르주아지도 있고 돈 없는 농민과 노동자도 있었기에 고통의 정도는 달랐지만, 아무튼 제3신분에게는 자신들이 세입을 전부 담당한다는 게 불만이었습니다. 의식 있는 부르주아지는 그렇게 자신들이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도 정치적 권력과 사회적 지위가 없는 게 불만이었고, 농민과 노동자는 세금은 뜯기는데 수입은 적어서 빈곤한 게 불만이었죠.
이런 와중에 국가 재정에 빚이 너무 많아서, 재무대신 네케르는 빚 상환 요구를 너무 빨리 받지 않기 위해 가공의 잔여액을 기입했습니다. 그러나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세입을 늘려야 했고, 그러려면 근본적인 개혁, 즉 제 1, 2 신분도 세금을 내게 하는 개혁이 아니면 도무지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새로운 재무대신 칼론느가 그런 개혁안을 제시했는데, 모든 국가의 행정명령이 고등법원 판사들의 장부에 기재되지 않는 한 효력을 발휘할 수 없는 당시 제도에서, 귀족이던 고등법원 판사들이 자신들의 특권을 줄일 개혁안을 반대했죠. 그러자 루이 16세는 명사회의(assemblee de notables)를 열어 귀족들을 소집해 승인받고자 했는데, 그 전에 네케르가 꾸며낸 것보다 실제 재정 상황이 나쁘니까 칼론느는 추궁을 받아 네케르의 분식회계를 폭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걸 핑계로 자기들 특권을 위협하는 개혁파 대신을 쫓아내고자 하는 귀족들의 저항이 강해져 혁명의 전주곡이 되었던 거죠.
* 동 대표, 집주인, 세입자 합동 삼부회를 엽시다! : 대충 제1신분(성직자)은 동 대표, 제2신분(귀족)은 집주인, 제3신분(평민)은 세입자로 치환했습니다. 갈수록 낮아진다는 것 외에 별 공통점은 없지만요...사실 귀족이 딱히 성직자보다 낮은 건 아니었으니 더욱 공통점이 없네요^^;; 프랑스 혁명에서 삼부회 소집을 제안한 건 귀족들이고, 그들은 왕권을 흔들어 절대군주제 하에서 빼앗겼던 봉건적 특권을 늘리려고 소집 안 할 거란 계산 하에 '땡깡'을 부려본 거였죠. 평민 중 이런 거에 신경 쓸 의식이 있는 부르주아지는 삼부회를 기회로 정치적, 사회적 권력을 얻고자 찬성했고요. 평민 중 하층인 노동자 및 농민들은 뭔가 나아지려나 하는 막연한 기대에서 귀족 및 부르주아지에게 동원되어 찬성했습니다.
* 동 대표 및 집주인과 세입자의 투표를 같은 가치로 인정치 않겠다고요? : 삼부회는 제3신분 대표의 수가 제1, 2신분 대표의 수를 합친 것보다 많았습니다. 그래서 머릿수 투표로 1인 1표를 인정한다면 제3신분이 이길 수 있었죠. 그런데 국왕은 기존 앙시앵 레짐의 관습대로 각 신분당 1표를 행사한다고 정했습니다. 그러면 제1, 2신분은 단합해 두 표를 행사할 테고 제3신분은 한 표이니 절대 이길 수 없었죠. 그래서 제3신분은 머릿수 투표를 주장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제3신분이 곧 국민이라며 '국민의회'를 선언했습니다.
* 무장하라(Aux armes), 세입자들이여! : "Aux armes, citoyen(무장하라, 시민들이여)!"에서 따온 겁니다. 현재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La Marseillaise)'의 후렴 첫 대목이고 하이라이트죠. 루제 드 릴이 '라인군의 군가(Chant de guerre de l'armée du Rhin)'라는 제목으로 지었는데, 1792년 7월 14일 바스티유 습격 기념 축제인 연맹제에 참가하러 와서 8월 10일에 튈르리 궁을 습격해 국왕을 사실상 폐위시킨 연맹군 중, 마르세유에서 온 병사들이 불러서 '라 마르세예즈'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혁명을 위협하는 외국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고 전 프랑스인의 단결을 호소하는 가사, 북쪽 라인강에서 지은 노래가 남쪽 마르세유 병사들의 노래가 된 사실은 프랑스 민족주의(nationalism, 국민주의)의 형성을 보여주죠. 또 데물랭이 바스티유 습격 이틀 전 팔레 루아얄에서 연설해 무장을 촉구할 때도 썼던 표현이에요.
트윗 140자의 한계 때문에 머릿수 투표가 불가능해지자 바로 무장봉기 일어나는 것처럼 썼는데, 프랑스 혁명에서는 중간과정이 더 있었죠. 국민의회를 선언하자 국왕이 국민의회를 인정치 않겠다며 삼부회로 돌아가 신분별 투표를 해라고 명령했는데, 국민의회 의원들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회의장을 폐쇄했고, 국민의회 의원들은 헌법이 제정돼 확립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는 '테니스 코트의 선서'를 했습니다. 그 후 근위대가 국민의회 회의장 앞까지 왔다가 국민의회에 합류한 자유주의적 귀족 대표들이 막아서자 돌아가고, 국경의 외국 용병들이 파리로 모여들어 파리와 국민의회가 무력진압당할 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조성되었습니다. 그 결과 파리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무장하고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것이죠.
----------
네, 혁명으로 인해 피가 흐를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제야 동정을 하죠? 인민이 그토록 오랫동안 악랄하게 억압받는 동안은 참으로 냉정함을 잘 지키시던 분들이. 그 동정심을 진작 인민에게 기울였다면 혁명이 일어날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오후 8:14 - 2014년 2월 22일 링크
* 이런 식으로 구 체제에서 고통받은 인민을 우선 동정하라며 혁명의 유혈, '인민의 심판'을 정당화한 건 로베스피에르가 혁명 처음부터 죽을 때까지 견지했던, 그리고 공포정치를 정당화하며 더욱 자주 말했던 견해입니다. 바스티유 습격 며칠 후 7월 20일에 랄리톨랑달 백작의 민중운동 진압을 위한 무장 병력 사용 동의안에 반대하며 바스티유 습격과 민중봉기를 옹호했다는 건 위에 이미 썼죠. 상퀼로트 봉기로 왕정이 사실상 폐지되고 상퀼로트가 혁명 프랑스의 실권자가 된 1792년 8월 10일 튈르리 궁 습격, 그리고 9월 학살 후에 지롱드파는 산악파 주요 인물인 로베스피에르, 마라, 당통이 삼두 독재를 획책한다며 공격했습니다. 이에 대해 로베스피에르는 11월 5일에 자기 변호 연설에서 8월 10일 후의 급진적 혁명까지 함께 옹호해 인기가 더욱 높아졌죠. 이 연설에서 9월 학살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법의 보복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민중이 내린 심판의 칼 아래 쓰러진, 비난받아 마땅한 희생자들에 대해서조차 애통해 하십시오. 그러나 모든 인간사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고통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더 비통한 재난을 위해 눈물을 아껴두십시오. 전제정에 희생된 수십만의 애국파를 위해 우십시오. (중략) 거의 언제나 자유의 적들만을 위해 탄식하는 동정심은 내가 보기에 미심쩍은 것입니다." 또 공포정치를 덕성을 위한 것이라며 정당화하는 1794년 2월 5일 '정치도덕의 원리에 관한 보고서'에서는 "어떤 사람들은 왕당파에 대한 관용을 외칩니다. 악당들에게 자비라니요! 안 됩니다! 무고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약자들에게 자비를, 불행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인류에게 자비를! 아! 도대체 그들은 누구를 불쌍히 여겼던 것입니까?"라고 했고요. 이 트윗은 이 두 연설에서 따온 것입니다.
----------
란지에 로젠크란츠(@Lanziee_R) : @1789Robespierre 역사적인 인물이 팔로우를 걸어주시다니, 영광인데요?
오후 11:27 - 2014년 2월 22일 링크
로베스피에르 : @Lanziee_R 후세의 혁명가께서 기억해 주시니,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그곳의 혁명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인민의 대리인인 국민의회가 인정받지 못해 인민이 직접 일어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헛되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
오후 11:45 - 2014년 2월 22일 링크
란지에 로젠크란츠 : @1789Robespierre 저희 역시 상황이 좋지만은 않은 편이지요. 당스부르크의 10년 공화정이 무너진 이후 세워진 신(新) 왕정에 의해 민중의 벗은 언제나 배척 받는 입장입니다. 혁명에 뜻이 있는 자라면 모를까, 일반 백성들은 그늘에 가려져
오후 11:55 - 2014년 2월 22일 링크
란지에 로젠크란츠 : @1789Robespierre 행동하는 저희를 아직까지는 낯설어하는 편이고요. 미래를 알고 있는 제 개인적인 입장으로서는 당신을 무조건 지지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모쪼록 바른길로 정치를 이끌어나가 주시길 바랍니다.
오후 11:55 - 2014년 2월 22일 링크
로베스피에르 : @Lanziee_R 생계를 위한 노동으로 완전히 소진한 인민들은 자신이 처한 불행의 원인을 숙고할 수도, 자연이 자신에게 준 권리를 인식할 수도 없는 법이지요. 공화정이 무너졌다니 그곳의 혁명은 먼 길을 돌아가고 있군요. 하지만 결국 자유, 평등,
오전 12:10 - 2014년 2월 23일 링크
로베스피에르 : @Lanziee_R 형제애의 세상이 오고 말 것입니다. 우리의 앞선 혁명이 그 진리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의 전례에서 배울 것은 배우되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서 혁명을 훌륭하게 완수하기를 바랍니다.
오전 12:11 - 2014년 2월 23일 링크
란지에 로젠크란츠 : @1789Robespierre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당신의 말대로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겠습니다. 세상은 '귀족'이 아닌 '모두'의, '노력하는 자들'의 것이 되어야만 하니까요. 민중의 '벗'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퇴색되지
오전 12:17 - 2014년 2월 23일 링크
란지에 로젠크란츠 : @1789Robespierre 않도록 언제나 주의하며 이전의 실패를 밑거름 삼아 더욱 진보된, 온 국민이 웃을 수 있는 그런 평화로운 나라를 반드시 만들고 말겠습니다.
오전 12:18 - 2014년 2월 23일 링크
로베스피에르 : @Lanziee_R 네, 모두가 평등하게 벗처럼, 형제처럼 어울리는 날이 올 것이고, 여러분이라면 분명 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비록 저항...아마 폭력 등 어두운 방법이 수반될 싸움으로 시작하지만 그 끝은 분명 평화겠지요. 앞으로도 응원하겠습니다.
오전 12:25 - 2014년 2월 23일 링크
* 란지에 로젠크란츠(Lanziee Rosen Kranz) : 전민희의 판타지 소설 『룬의 아이들』에 나오는 가상의 혁명가입니다. '아노마라드'라는 나라에 사는데, 혁명이 일어나 공화국이 세워졌지만 10년만 유지되고 수반 당스부르크가 죽은 후 무너져 신(新) 왕국이 들어선 상황에서, 공화정을 이루기 위해 비밀결사 '민중의 벗'에서 활동하고 있죠. 전민희 씨는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했고, 중세 판타지 기반 소설에서 공화국을 세우려는 공화파는 전민희 작품 외에는 찾기 힘들다고 합니다. 또 전민희 씨는 존경하는 인물로 로베스피에르를 꼽았고(인터뷰 링크), 『룬의 아이들』의 등장인물인 란지에 로젠크란츠와 막시민 리프크네는 로베스피에르의 영향을 많이 받은 캐릭터 조형이라고 합니다(엔하위키 로베스피에르 항목 링크).
* 란지에 봇과의 이 대화는 각자의 혁명의 뜻을 다지면서, 후세는 '혁명의 아버지'(앞서 영국의 청교도 혁명, 명예 혁명, 미국의 독립전쟁이 있었지만 근대 세계와 이후의 혁명들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에서)인 프랑스 혁명의 명과 암을 모두 보고 배울 것은 배우고 한계는 뛰어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었죠. 항상 혼자 놀다가 대화 나눠본 건 란지에 봇이 처음이었는데 이런 의미심장한 혁명 고찰까지 하게 해주셔서, 란지에 봇주님께 감사드립니다.
* 생계를 위한 노동으로 완전히 소진한 인민들은 자신이 처한 불행의 원인을 숙고할 수도, 자연이 자신에게 준 권리를 인식할 수도 없는 법이지요. : 삼부회 선거 전 1789년 2월에 로베스피에르가 '아르투아 삼부회 개혁의 필요성에 대하여 아르투아 국민에게'라는 글에 쓴 구절을 그대로 따온 겁니다. "우리 주의 도시와 농촌에 사는 사람들의 절대 다수는 빈곤으로 최악의 비참한 상태로 전락했다. 그 상태에서 인간은 삶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고된 노동으로 완전히 소진해 자신이 처한 불행의 원인을 숙고할 수도, 자연이 그에게 준 권리들을 인식할 수도 없다.'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물질적 기반이 필요하며, 빈곤은 자유를 누릴 능력의 부재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을 잘 표현한 구절이라고 생각합니다.
* 비록 저항...아마 폭력 등 어두운 방법이 수반될 싸움으로 시작하지만 그 끝은 분명 평화겠지요. : 로베스피에르는 1794년 2월 5일 '정치도덕의 원리에 관한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유와 평등의 평화로운 향유입니다." 로베스피에르의 마음 속에서 공포정치는 그 자체 목적이 아니라 평화로 가기 위해 필요한 수단이었던 겁니다. 또 1793년 12월 25일 '혁명정부의 원리에 관한 보고서'에서 그는 입헌정부는 공권력에 대항해 개인의 기본권을 옹호한다는 평화의 원칙에 기초하지만 혁명정부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적을 전멸시킨다는 전쟁의 원칙에 기초한다며 혁명정부의 특수성을 주장했죠. 일반적인 상황 즉 입헌정부가 있는 상황에서는 평화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은 그의 혁명전쟁 반대와 사형제 폐지 주장에서도 드러납니다.
다만 그런 혁명, 다시 말해 반혁명에 대항하는 전쟁, 공포정치가 끝나고 평화로 돌아가는 시점이 언제인가가 논란의 대상이죠. 대외전쟁을 승리로 끝내는 시점까지여서 테르미도르 반동이 없었어도 곧 스스로 공포정치를 끝내려 했을까요, 아니면 자유와 평등이 완전하게 확보되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이 이루어질 때까지여서 스스로 공포정치를 끝낼 수 없었을까요? 파리 상퀼로트들의 봉기가 있고 나서야 법률적 공포정치가 도입되었고, 최고가격제가 꼭 필요한 군수품과 빵에만 엄격히 적용되고 나머지 품목에서는 처벌이 잘 안 이루어졌던 것에서 보듯 공포정치 및 통제경제정책을 전쟁 수행에 필요한 수준까지의 양보로만 시행한 것은 전자를 지지합니다. 하지만 1794년 6월 무렵에 플뢰뤼스 전투(6월 26일) 등 대외전쟁에서의 큰 승리들을 거두어 대외적 위협이 줄어든 상황에서, 도리어 법정에서 변호를 금지하고 증거가 불필요하게 만든 프레리알 22일 법(1794년 6월 10일)으로 사형이 크게 증가하고 공포정치가 강화되었다는 점은 후자를 지지합니다. 학계에서 모두가 동의하는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
바스티유 습격이 성공할까요? 그 후에 혁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새 세상을 세우는 데 성공할까요? ...후에 어떻게 되든 이것만은 알아주시겠습니까? 우리는 너무 오래 억압받았고, 위로부터의 구원만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오전 12:29 - 2014년 2월 23일 링크
* 프랑스 대혁명은, 특히 그 중에서도 가장 급진적이고도 독특했던 공포정치는 많은 논란의 대상이죠. 대내외적으로 극심한 위기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고 결국 공화국을 구하는데 성공했다는 옹호 논변도 만만치 않지만, 그래도 그 자체로는 끔찍했고 잘 봐줘봐야 필요악이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 겁니다. 그래도 혁명의 처음, 구체제가 공포정치에 비해 눈에 띄는 폭력은 적었더라도 구조적 억압이 인민을 말려죽이던 상황을 타개하고자 저항하기 시작한 것은 옳았다고, 스스로 자유를 얻고자 한 최초의 선의지는 이후에 과오가 있었더라도 퇴색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이 로베스피에르 봇을 통해 전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메시지예요.
'수동 트윗'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동 트윗 모음 : 2014. 3. 30 ~ 2014. 4. 5 (0) | 2018.06.27 |
---|---|
수동 트윗 모음 : 2014. 3. 20 ~ 2014. 3. 29 (0) | 2018.06.27 |
수동 트윗 모음 : 2014. 3. 9 ~ 2014. 3. 19 (0) | 2018.06.27 |
수동 트윗 모음 : 2014. 3. 2 ~ 2014. 3. 8 (0) | 2018.06.27 |
수동 트윗 모음 : 2014. 2. 23 ~ 2014. 3. 1 (0) | 2018.06.27 |